“위안부는 천황제가 만든 성폭력 시스템”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10-08-06   조회수 : 4030
ㆍ日 스즈키 유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젠더’ 출간

일본 사회운동사 연구가인 스즈키 유코(일·한 여성과 역사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는 최근 한국에서 출간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젠더>(이성순·한예린 옮김/나남)에서 아시아 위안부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가라유키 상을 분석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40년 이상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유로 ‘전쟁 책임의식 부재’ ‘식민 지배에 대한 무반성’ ‘천황의 전쟁 범죄·책임 면책’ 등과 함께 ‘일본인의 성의식’을 꼽았다. 근대 일본의 성문화·성의식과 이어진 국가 관리 매매춘 시스템인 ‘공창제’는 여성을 성적 도구로 보는 천황제 아래 국가권력의 근본 사상이었고, 이런 사상과 시스템이 위안부 문제로 직결된다고 분석했다.

스즈키는 “일본 정부는 해외 매춘을 묵인하고 가라유키 상에게 해외식민, 개발, 팽창의 선도 역할을 부여했다”며 “일본 여성들은 국가적 강간, 조직적 폭력시스템 아래에서 강제매춘과 성폭력, 강간을 강요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즈키는 일본 메이지시대 부국강병을 강조한 계몽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1896년 1월18일 발표한 ‘인민의 이주와 창부의 돈벌이’라는 글을 예로 들었다. 후쿠자와는 이 글에서 여러 이유를 들며 ‘창부 수출’을 적극 권장했다. 우선 해외이주·식민사업 발전에 따라 ‘단신 부임’하는 남성의 ‘욕구’를 해결하고, 해외 주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창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창부’ 자신도 돈을 벌어 고향으로 송금하고, 근사한 집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스즈키는 “일본 여성들을 이런 시스템에 가뒀던 국가권력이 다른 민족 여성들, 특히 일본 식민지 여성 인권을 존중할 리가 없었다”며 “인권 유린의 전형적인 예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그녀들을 일본군 장병의 ‘위문품’, 곧 성노예화했던 위안부 제도”라고 말했다. 후쿠자와의 주장은 이후 위안부 동원 논리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특히 그 중 ‘돈벌이’ 즉 ‘상행위’라는 억지는 100년이 지나서도 망언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는 실정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가쓰는 지난 96년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때 위안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거라면,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즈키는 위안부 제도에서 천황제 문제를 끌어낸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 시스템으로 천황제 국가가 일으킨 국가 범죄”라는 것이다. 군의 조직적 성폭력 시스템과 범죄는 ‘억압의 이양’ 원리로 증폭되고 악순환된다. 스즈키는 “군 내부에서는 상급자, 고참병이 하급자나 신참병을 괴롭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약자를 괴롭히는 ‘억압의 이양’의 원리가 밖으로 나가 점령지 주민을 죽이거나 부녀자를 강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이 ‘천황폐하를 위해’ 미련 없이 깨끗하게 죽는 것을 군인의 본분이라고 철저하게 교육받은 일본 병사에게 상대의 인권이나 고통을 생각하는 인간성이 자랐을 리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인 대부분은 천황제 문제나 가해 책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1945년 8월 패전(일본은 ‘종전’이라 부른다)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천황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라며 사죄했다. “쇼와천황 히로히토는 전쟁 피해자이며 평화주의자”라는 이미지가 일본 패전 직후에 만들어져 오늘날에도 계속 재생산된다는 게 스즈키의 분석이다. 그는 “전후의 잘못된 첫 걸음은 서민을 전쟁으로 내몰았던 최고 책임자를 사죄한 데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스즈키는 1995년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발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본질도 파헤친다.

국민기금 사업은 한국, 대만, 필리핀 3개 지역 피해자 285명에게 기금을 지급하고 2007년 3월 종료됐다. 하지만 그 폐해는 컸다. 이 기금을 받았는지 여부가 시민단체 사이는 물론 피해여성 사이에서 주요한 갈등 요소가 되기도 했다.

스즈키는 “일본 정부는 죄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죄한 뒤 법적 배상을 하는 정당한 길을 택한 게 아니라 죄를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 국민의 ‘위로금’이라는 이름으로 국민기금을 포장했다”며 “국민기금은 발족 이후에도 피해당사자나 지원단체 사이에 갈등이나 불신,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이용됐다”고 비판한다.

‘국민기금’ 안에는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문제도 놓여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1876년 강화조약(조일수호조약),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 때처럼 ‘국민기금’은 ‘자주’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결국 한국의 자주권을 짓밟고 독립을 앗아간 ‘식민지주의’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가라유키(唐行) 상’. 말뜻 자체는 ‘해외에 나간 사람’이지만,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매매춘을 목적으로 해외로 빠져나간 일본 여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이들은 ‘밀항부’ ‘낭자군’ ‘해외 매춘부’라는 경멸스러운 호칭으로도 불렸다. 매춘업자들은 주로 가난한 여성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하거나 유괴해 조선, 만주, 시베리아, 동남아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지로 보냈다. 일본의 통계를 보면 1910년 가라유키 상은 모두 2만3362명으로 집계됐다.

일본의 이 같은 ‘창부 수출’은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다.

출처 : 일본군위안부피해자e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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