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출생 110년 ‘조선의 레닌’ 박헌영
매체명 : 중앙일보   게재일 : 2010-06-23   조회수 : 4378
한국전쟁 60돌,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박헌영이다. 1900년 충남 예산 태생이니 올해로 출생 110주년이다. 최근 몇 년 『박헌영 평전』과 전집(전9권) 출간에서 보듯 그는 여전히 조선의 레닌으로 음미되고 있다. 모종의 ‘박헌영 향수’다. 그건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인물에 대한 동정 혹은 미완의 혁명가에 대한 아쉬움일까? 지적인 외모의 그는 필명도 그럴싸했다. 이정(而丁). 반동세력을 긁어내는 고무래(긁개)란 설, 공산주의 상징인 쇠스랑(而)과 망치(丁)라는 설 중에서 쇠스랑·망치가 맞을 것이다.

박헌영 경력의 으뜸은 북한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1948년) 이전에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으로 코민테른이 인증하는 간판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동휘가 주도한 이르크츠그파 고려공산당 경력도 있으니 나이·경력에서 띠 동갑인 김일성(12세 연하)보다 몇 수 위다. 이 분야 연구의 선구자 서대숙(전 하와이대 교수)이 그를 정통파 올드 커뮤니스트로 분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뉴 코뮤니스트 김일성과는 달랐다는 식인데, 그런 시각 자체가 맹점이다. 결정적으로 6·25 당시 그의 책임을 놓치기 때문인데, 해방 후 북한권력의 1, 2인자 박헌영·김일성은 다른 점만큼 닮은 점이 더 많았다. 그게 포인트다.

구체적으로 그는 김일성과 6·25를 공모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펴낸 박명림도 박헌영·김일성을 ‘전쟁의 공동결정자’로 못 박는다. 그게 진실이다. 박헌영이 반대했는데, 김일성이 전쟁을 강행한 게 전혀 아니다. 실제로 전쟁 전 스탈린·마오쩌둥과의 연쇄회담에 둘은 내내 함께 붙어 다녔고, 한 목소리를 냈다.

훗날 김일성이 패전 책임을 물어 사형시킨 것도 박헌영 몫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물론 둘은 ‘승리 이후의 몫’를 놓고 동상이몽의 처지였다. 그래서 더욱 경쟁적으로 전쟁에 몰입했고, 끝내 이 땅에 참화를 일으켰다.

그는 미완의 혁명가가 아니라 실패한 인물이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지만, 그는 탈선한 열차였다. 기회에 따져볼 건 그가 남긴 ‘극단주의 언어주술(呪術)’의 유산이다. 박명림에 따르면 그는 극도의 흥분 그리고 과장·증오로 뭉쳐진 폭력적 언어구사의 달인이었다. 저들은 특유의 장광설과 상투적 언어를 반복하지만, 그 중에서도 챔피언이 박헌영이다. 그건 남로당 넘버 투 이승엽도 마찬가지였고, 현재 북한 언어에 영향을 줬다. 걸핏하면 나오는 서울 불바다 폭언, 크게 화난 듯한 TV앵커들의 난폭한 언어가 그 증거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박헌영·이승엽의 나쁜 유산을 본다. 저들은 왜 저렇게 살까 싶지만, 사회 전체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말했던 증오의 공식언어(newspeaks)로 마비됐다고 보면 된다. 극단주의·조급주의를 반영하는 병든 언어심리가 60년 전 이 땅에 전쟁을 낳았고, 지금 한반도 정세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헌영을 낭만적으로 보려는 이들은 그걸 모른다. 그가 경기고보 출신이요,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도 그의 러시아 탈출을 소재로 했다는 지엽적 스토리만 반복한다. 이미 역사 속의 인물 박헌영, 그는 풍운아였다. 하지만 더도 덜도 아닌 박헌영일 뿐이다. 그게 실체적 진실이다.

2010.06.23 중앙일보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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