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년)
매체명 : 선샤인뉴스   게재일 : 2009-10-22   조회수 : 5946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대체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의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의 명목상 수장으로서 유럽에 가톨릭 세력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반개혁 세력을 옹호하였다. 그러니 신성로마제국은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말마따나 “신성할 것도 없고 로마도 아니며 사실상 제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독일 군주들은 페르디난드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이른바 30년 전쟁(1616-1648)이 전개되었다. 이는 독일 인구의 약 10%를 포함하여 약 1천만명을 죽인 참혹한 종교전쟁이었는데,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2008)』는 ‘세계 역사를 바꿔 놓은 지난 20세기의 베스트 조약’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을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유럽은, 교황에 의해 영적인 지배를 받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세속적인 통치를 받는 단일 기독교 제국이라는 개념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보편적인 가치관을 지닌 세계가 끝났고, 각 국가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성직자에게서 특권을 빼앗아 영주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그 결과 국가가 역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때에 국가의 역사의 원동력이 된 시대를 이론적으로 설파한 이는 단연 영국의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가 출간된지 7년 후인 1651년 5월 런던에서 발간된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은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The Book of Job)’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유한한 인간이 그 힘에 대항하는 일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욥에게 보여주었던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바다괴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욥이 하나님에게 복종했을 때, 하나님은 과거에 자만과 오만으로 얼룩진 욥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축복했다. 그런 ‘리바이어던’이라는 제목을 통해 홉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홉스는 국가를 ‘유한한 하나님’으로 간주하여 교회도 국가에 종속시켰다. 그는 교회를 하나의 단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해 법과 정부의 지배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에 도덕적 비중을 부여하는 데 있어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보다 더 인색했다. 홉스는 ‘민주주의를 격렬히 비난한 국가 절대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인간관의 문제였다.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런 권력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거나,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상상 또는 허구”라거나, “웃음은 타인의 결점이나 자신의 과거 결점과 비교하여 느끼는 우월감에서 나오는 순간적인 자만심이다”라고 말한 그의 명언(?)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홉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협동적이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위협”이 있고,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역겹고 잔인하고 짧다”고 보았다. 국가의 존재 이전의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은 만인에 대한 적’일 뿐이며, 인간을 협동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국가의 통제하에 있을 때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인간은 공격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인간의 자연스런 조건이고 이성은 대체로 열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화형식

홉스의 인생 경력도 그런 생각에 일조했을 것이다. 밀턴이 스투어트 왕정의 적이었으며 심지어 찰스 1세의 처형을 지지했던 데 비해, 홉스는 영국 내전 초기에 프랑스로 달아났던 철저한 왕당파였다. 그는 프랑스 망명 중에 훗날 찰스 2세가 된 사람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당파였지만 『리바이어던』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은 프랑스 국왕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11년간의 프랑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652년 2월 영국으로 귀국해 크롬웰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1660년 왕정이 복구될 때까지 조용히 지내다가 왕정이 복구되자 찰스 2세로부터 작은 연금을 받았다. 흡스는 미신적인 이 왕을 싫어했는데, 왕은 1666년의 런던 대화재와 대역병 이후에 홉스가 무신론자가 아닌지 의심해 조사까지 하였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하는 군주가 찰스 1세를 지칭한다는 소문과 시민전쟁에서 의회파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크롬웰을 지칭한다는 소문이 공존했는데, 일부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이 크롬웰에게 아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이 무엇이건, 홉스는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면서도 신에 대한 모든 묘사를 비유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은『리바이어던』을 교재로 선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잘못되고 반역적이며 불경스러운” 책이라고 해서 공공연히 불태웠다. 물론 홉스의 무신론이 이유였다.

홉스의 생존시 그의 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호비스트(Hobbist)라 불렸고, 호비즘(Hobbism)은 아주 위험하고 해로운 사상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으로매도되었다. 그렇지만 선수들은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홉스의 사상은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벤담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로크는 자신의 『시민정부론』이 홉스의 작품 여러 곳을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자 공개적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결코 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옥스퍼드 학생이었을 때 출판되었으며 엄청난 논란이 된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김용환 Hobbes 2005)

세이빈 솔슨(Sabine & Thorson 1983)은 홉스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임과 동시에 철저한 개인주의자로서 국가권력과 법의 권위는 개인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때만 정당화된다고 했다는 걸 강조한다. 이들은 “홉스의 철학을 당대에 가장 혁명적인 이론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이 명백한 개인주의였다. 군주제의 옹호는 이에 비한다면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동물(a leviathan)인데, 이 리바이어던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가 행하는 바가 훌륭하다는 유용성의 차원으로 전락하며, 그나마도 개인적 안전을 지켜주는 종복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홉스는, 인습적인 경제제도 및 사회제도들 속에서 생겨난 2세기에 걸친 퇴폐가 야기시킨 인간본성에 대한 어떤 관점을 종합했다. 더욱이 그는 적어도 앞으로 2세기 이상 동안이나 사회사상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 정신, 즉 자유방임(laissez faire)의 정신을 간파해냈다.”

‘위대한 콜럼버스’인가 ‘맘스베리의 악마’인가?

홉스는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개척한 위대한 콜럼버스였다”는 찬사와 “최고의 무신론자이며 맘스베리(Malmesbury: 홉스의 고향)의 악마였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아무래도 찬사쪽이 다 강한 것 같다. 프레스톤 킹(Preston King)의 극찬이다. “홉스는 마키아벨리보다 더 분석적이며, 보댕보다 더 간결하며, 데카르트보다 더 역사적이며, 스피노자보다 더 통찰력이 있으며, 로크보다 더 일관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들 모두보다 더 근대적이었다.”(김용환 Hobbes 2005)

홉스와 그의 사상에 우호적인 사람들에겐 리버틴(libertine)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는데, 오늘날 이른바 자유분방주의(libertinism)는 도덕률과 도덕적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질이나 행태를 뜻한다. 홉스 시절의 사람들이 홉스를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부른 이유는 주로 그가 무신론자이고 국교를 믿지 않고 당시의 일반적인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용환은 홉스는 결코 무신론자는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오해돼 경멸적으로 불렸지만, 홉스는 자유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김용환 Hobbes 2005) 자유주의자라면, 그 시절엔 튀는 자유주의자였던 셈이다.

홉스는 물리과학의 모델을 사회연구에 응용한 최초의 사상가로서 종종 사회과학의 창시자라는 말을 듣는다. 홉스는 물질과 생명과 정신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믿은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였다. 그는 모든 사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객관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다. 홉스에게 보편적인 것은 없고 오직 ‘이름’만 존재했다. 이름이 없고, 단어가 없고, 언어가 없다면 진실과 거짓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단어와 허위라는 단어는 어떠한 내재적 의미도 없는 바, 이들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말의 속성이라는 게 홉스의 생각이었다.

홉스는 평범하고도 단순한 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은유법(隱喩法: Metaphor)을 경멸했다. 은유법은 유추(類推)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사물이나 관념을 대치 외연(外延)하는 수사법이다. 홉스는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도덕과 정치의 세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은유법을 포함한 수사학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수사학자들은 “정념에 적합한 말들을 비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시키며 수사적인 논리를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수사학은 이성이 맞서서 싸워야 할 최대의 교활한 적이다. 사람의 감정에 주로 작용함으로써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김용환 Hobbes 2005).

그러나 홉스의 책 제목(리바이어던)도 은유법이었으며, 책의 본문에서도 다양한 수사법이 동원되었다. 그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war of each against all)’을 말했지만, 자신도 자신이 묘사한 부정적인 인간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협동과 상부상조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사후 수백년간 적어도 국제질서에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미국은 그런 투쟁의 승자로 우뚝 서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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