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10월 26일] 박정희와 김재규와 이만섭
매체명 : 한국일보   게재일 : 2009-10-26   조회수 : 5846
박정희와 김재규. 여덟 살 차이의 고향(경북 선산) 선후배이자 육사 동기(2기)로 1946년 나란히 소위에 임명됐다. 진급은 김재규가 늦었다. 소위 시절인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에서 자기 부하를 강제 연행하려는 미군 헌병을 칼로 위협한 사건으로 건국 이후 최초로 명예 면관을 당한 후, 1년 4개월 만에 복직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재규를 박정희는 챙겼다. 5.16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지만 보안사령관, 건설부장관, 중앙정보부장에 앉혔다. 선배는 후배를 끔찍이 아꼈고, 후배는 충성을 다했다. 꼭 30년 전 그날의 비극 전까지는.

박정희와 이만섭. 이만섭이 최근에 쓴 책 <5.16과 10.26>(나남 펴냄)을 보면 둘의 첫만남은 1962년 가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기자로 울릉도로 가는 군함에서였다고 한다. 둘은 언론을 놓고 대화를 했고, 이만섭은 5.16 이후의 박정희를 단독 인터뷰 했다. 이후 가끔 비공식적으로 만나면서 민족의식,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대해 서로 공감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3년 가을, 이만섭은 박정희를 돕겠다며 공화당에 들어가 첫 대구 유세에서 지원연설을 했다. 그 덕분에 전국구 의원이 됐고, 30년 후에는 국회의장이 됐다.

김재규와 이만섭. 둘은 사제지간이다. 이만섭이 대륜중 4학년이던 1947년 8월, 면관을 당하고 나서 김천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있던 김재규가 대륜중 체육교사로 왔다. 그 때 김재규가 아꼈던 제자가 훤칠한 키에 농구선수로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던 이만섭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육상선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400m 달리기에서 동양신기록을 세운 엄팔용, 10.26에 가담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박선호도 그가 좋아했던 제자였다. 김재규는 군에 복직한 후에도, 자신이 대륜중 교사였고, 이만섭이 자기 제자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렇게 고향과 정치 선후배, 사제로 얽힌 세 사람은 청와대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만섭 의원에게 "저녁이나 먹자"고 전화하면, 이만섭은 김재규 장군과 함께 하자고 제안했고, 그러면 박정희는 "그거 좋지"라고 흔쾌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만섭이 반대했던 3선 개헌 전까지였고, 박정희와 김재규의 식사도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인연을 돌아보며 이만섭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목숨 걸고 막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는 가정이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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