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밤거리서 자유를 박탈당하다
매체명 : 세계일보   게재일 : 2009-02-06   조회수 : 6101
강호순이 여성들 귀가시계 바꿨다’ ‘한국판 위기의 주부들… 성매매 수입으로 명품 구입·헬스클럽 회비로’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파문’….

최근 신문지상을 달군 연쇄살인범 강호순 관련 기사와 중산층 주부들의 일명 ‘성매매 알바’, 도덕성을 무기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민주노총 간부의 일탈행위 등이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특히 강호순 사건이 터진 이후 여성들의 귀갓길 변화가 눈에 띈다. 회식 등 회사의 저녁모임을 가급적 자제하는 것은 물론 남편이나 아버지·오빠 등 남자 가족의 ‘보호’를 받으며 퇴근하거나 귀가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심지어 호신용 손칼과 가스총·전기충격기·호루라기 등을 휴대하는 여성이 생겨나는가 하면 위치추적서비스 가입자도 급증하고 있다.

왜 늘 여성들일까. 연쇄살인범들은 왜 꼭 성폭행과 살해를 반복하며 그 대상을 여성으로 삼을까. “여자만 보면 살인충동을 느꼈다”는 사이코패스(반사회적인격장애자)로 진단된 강호순의 말은 기존 상식과 통념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마침 출판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시의성 있게 섹슈얼리티 관련 책을 잇달아 쏟아냈다.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이성숙 지음, 책세상)는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밤거리라는 공간을 포기하게 한 사건은 110년 전 영국에서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1888년 런던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은 이스트엔드의 번화가 빈민지역에 살면서 성매매로 살아가는 가난한 여성 8명이었다. 여성들은 밤거리에서 무참히 살해됐고 이른 새벽 행인에게 발견됐다.

사건은 번화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발생했지만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수백 명의 건달과 폭력배를 무작위로 체포해 조사했으나 혐의점을 못 찾고 현재까지 미제로 남아 있다. 당시 주요 신문사에는 ‘잭 더 리퍼’라는 서명과 함께 “연쇄 살인은 부도덕한 여성들에 대한 단죄이며 그들의 행위에 대한 처벌”이라는 내용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후 ‘잭 더 리퍼’ 사건을 모방한 사건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고, 점차 밤거리를 혼자 다니는 여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해방 이후 한국의 여성 섹슈얼리티 담론을 비교분석한 책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개인의 성적 욕망이나 태도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억압돼 왔는지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다.

책은 또 빅토리아기에 시행된 성병방지법이나 한국의 산아제한제도, 기생관광, 양공주와 미군 기지촌 여성 등을 국가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개입한 사례로 거론했다.

‘섹슈얼리티와 위험 연구’(조병희 지음, 나남)는 에이즈라는 질병을 대상으로 질병 인식의 사회적 구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의 주제는 ‘위험’으로서의 성이란 영역이다. 건강 또는 질병 측면에서 성 안전과 성 위험을 개념화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에이즈는 잘못된 성 행동과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주며, 일반인·에이즈 감염자·남성 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의 성 행동과 에이즈에 대한 인식과 관련한 인터뷰를 진솔하게 실었다.

‘성 정치학’(케이트 밀렛 지음, 김전유경 옮김, 이후)은 가부장제가 어떻게 문학과 철학·심리학·정치학에 침투해 있는지를 상세히 보여주며,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 온 문학의 고전들이 여성을 모욕하고 공격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섹스야말로 인간의 여타 행위들 가운데 성 정치학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성혁명의 전투장이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개개인의 ‘의식’이며, 성혁명이야말로 정치혁명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삶의 질을 변화시켜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의 통찰은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한 문제 제기로 다가온다.

‘조선의 섹슈얼리티―조선의 욕망을 말하다’(정성희 지음, 가람기획)는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였지만 그것은 여성들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이혼하거나 과부가 되더라도 개가할 수 없었던 반면 남성들에게는 축첩이 인정돼 실제로는 일부다처제였던 조선의 비뚤어진 결혼제도를 분석했다.

결혼·정절·순결·간통·매춘 등의 역사를 통해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특성을 적나라하게 짚은 책은 당시 성풍속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차이, 양반과 서민의 차이를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후궁과 첩이 존재했던 그 시대, 그들로부터 밀려난 여성들의 눈물바람 이야기와 그 눈물바람이 일으킨 무서운 피바람 이야기까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조선시대엔 특히 성폭행 사범에 엄격했고, 강간이냐 화간이냐 논쟁이 될 땐 강간에 무게중심을 두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여자가 거절하는데 남자가 겁간하려 하면 성관계의 유무를 떠나 강간이 성립한다. 암탉이 수탉에게 쫓기어 쉴 사이 없이 달아나다가 모면하지 못한 것을 어찌 화간이라 하겠는가?”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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