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은 왜 탄핵 됐을까…‘불편한 진실’
매체명 : 매일경제   게재일 : 2015-02-07   조회수 : 1392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 배상열 지음 / 추수밭 펴냄
소설 징비록 / 이번영 지음 / 나남 펴냄
기사입력 2015.02.07 04:01:03 | 최종수정 2015.02.07 07:38:11

지난해 방영된 KBS 대하사극 ‘정도전’은 매회 최고 화제를 뿌렸으며 그 열기는 출판계로도 이어져 정도전 삶과 사상을 담은 서적들이 서점에 쏟아져 나왔다. 올해에는 ‘징비록’이 정도전에 버금가는 명성을 남길 수 있을까. KBS 1TV 50부작 ‘징비록-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이 오는 14일 첫선을 보이면서 시청자들과 방송가 안팎에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벌써 ‘징비록’을 소재로 한 역사서와 소설이 속속 판매대에 올라온다.

배상열이 쓴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은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 망각에 길들여진 한국 역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문이다. 7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거의 모든 고을이 참혹하게 유린됐고 인구 절반이 원통하게 희생됐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정무와 군무 최고기관인 비변사 수장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란을 겪고 난 뒤 그런 모진 환란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저술이다. 자신을 포함한 조정 신료들과 임금, 사대부, 군지도부 등 지도층의 잘잘못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전쟁 초기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군지도부는 이를 무시했다. 유성룡은 “수군에서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한 사람도 출동시키지 않았다. 우수사 원균은 배가 많았고 또 적병이 단 하루 동안에 모두 몰려든 게 아니었는데도 적군을 바라만 보면서 싸우려들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적군이 처음 육지에 오르자 원균은 전선 100여 척과 화포, 병기 등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힌 다음 도주했다. 임금은 한술 더 떠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할 궁리만 했다. 그가 “떠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하자 선조는 앙심을 품고 유성룡에게 사지인 도성 방어 책임을 맡기려고까지 했다.

‘징비록’ 가치는 일본에서 높게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후 비공식적인 경로로 일본에 유입돼 1695년에는 국책사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징비록’을 읽고 성찰하지 못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완성한 지 불과 32년 만에 조선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다. 그러고도 외부를 향해 물꼬를 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졌던 조선은 일본에 멸망했다.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다음에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임진왜란과 놀랍게도 닮았다. 온 국토가 외세의 힘이 부딪치는 전쟁터가 되면서 무수한 국민이 죽어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지도자란 자들은 한결같이 저 살기에만 급급했다.

이번영이 쓴 ‘소설 징비록’ 역시 관점은 다르지 않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류성룡의 능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반대파들의 중상비방과 탄핵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한다. 소설은 유성룡과 이순신이 왜 탄핵을 당해야 했는지, 전란 당시 임금과 신료들은 무엇을 했고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명나라는 과연 우리 우군이었는지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파헤친다. 2014년 4월 16일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 선장은 어린 학생들과 젊은 교사들에게 제자리를 지키라는 안내방송만 남긴 채 가라앉는 세월호를 떠났다. 우리 역사에서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되는 비극이 오늘도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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