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지훈국학상

수상자
안대회
수상작품
《담바고 문화사》
수상자의 말

지훈상 국학분야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만감이 교차하면서 뿌듯함이 밀려 왔습니다. 실제로는 세 분 심사위원께서 뽑아 주신 것이지만 지훈 선생께서 “자네! 그렇게 공부해도 된다”고 허락하신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지훈 선생을 뵌 적은 없습니다만,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공부하면서 지훈 선생과 병칭되는 박두진 선생님을 자주 뵙고 그분들에 대한경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를 외웠고 다른 저작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대여섯 종의 시집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 지훈 선생 저작으로 다시 읽은 것은 《채근담》이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조선 후기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만해 한용운 선생과 김구용 선생, 그리고 지훈 선생의 번역서를 비교하며 읽었습니다. 책의 구성과 문체가 다 다르지만 모두 훌륭한 책입니다. 그런데 지훈 선생의 책은 번역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뿐더러 그 자체가 아름다운 시적 문장에다 요즘 젊은 작가가 쓴 것 같은 싱싱한 언어로 쓰였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5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말입니다. 지훈 선생의 이름으로 주시는 상을 받고 보니 불현듯 그 책을 읽고 감탄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담바고 문화사》란 주제로 단행본을 쓰고 이렇게 학술상을 받게 된 것은 조금 뜻밖일 것입니다. 책을 낸 뒤로 많이 받은 질문은 “담배 피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술 동기가 궁금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피우지 않습니다. 30년 전 대학 다닐 때 2~3년 피운 적이 있습니다만 제게는 안 맞은 기호품인 듯해 어렵사리 끊었습니다. 대신 담배 끊느라 그 무렵 등장한 자판기 커피에 맛을 들여 지금까지 즐겨 마시게 되었습니다.


다른 질문은 문학 연구자가 왜 담배와 흡연을 연구했느냐는 것입니다. 본업에는 충실하지 않고 곁길로 빠지는 우려를 담은 질문일 것입니다. 저 자신도 연구 내내 생뚱맞은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자문하고 자주 망설였습니다. 제 자신이 그러니 다른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주제를 저서로까지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이옥(李鈺)의 저술 《연경-담배의 모든 것》을 번역하여 낸 것에 있습니다. 2천 년대 들어와 저는 18세기 소품문에 관심을 집중하여 자료를 찾고 논문을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작가와 작품주제를 찾아내어 소개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연경》(烟經)은 그 무렵 김영진 교수가 발굴하여 소개했는데, 저는 그 작품에 큰 흥미를 느끼기도 했고, 마침 제가 교수로 있던 영남대에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 인연으로 번역하여 출간하였습니다.


그때 20세기 이전 담배 관련 자료와 논문을 조사하면서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대충 찾아 본 자료는 너무 많았던 반면에 본격적인 논문은 몇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단행본은 아예 없었고, 관련한 것으로 겨우 근대이후 연초산업에 관한 박사논문이 전부였습니다. 백 년쯤 된 문일평 선생의 〈담배고〉가 가장 볼 만한 논문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담배가 차지하는 위상과는 다르게 한국의 인문학자에게는 정말 인기가 없는 주제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라는 하찮은 기호품에다 그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대부분의 자료가 한문으로 쓰인 것 등이 관심을 방해했을 테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방해물은 아마도 정규학문의 어떤 분야에도 속하지 않는 간학문적(間學問的) 주제라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연초학과가 한 군데 있고, 연초학회지도 있습니다만, 재배와 생산에 집중할 뿐 역사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KT&G가 생산과 판매에만 관심을 둘 뿐 흡연의 인문적 가치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계나 산업계의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라도 해야겠다는 게 제 만용이고 탐심이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연구의 필요성을 실감한 사람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흡연도구도 모았는데 자료도 도구도 예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욕심으로는 흡연사 자료집을 내어 다른 연구자에게 제공하고 싶기도 했습니다만 과욕이라 치부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공부한 결과를 문학동네 사이트에서 연재하였는데 대개는 제가 처음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사실을 발견하여 분석하고 서술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국문학과 학부를 다닐 때 나손 김동욱 교수님께 춘향전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몇 가지 말씀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중 하나가 춘향이 첫날밤에 입은 옷차림이 겉옷에서 속옷까지 모두 몇 종류인지 아느냐 하시면서 스물댓 가지(?제 기억이 맞다면)이고, 그걸 다 벗으려면 날밤 새운다고 하셨습니다. 복식을 구체적으로 몰라 주변에 물어봐도 답을 해주는 이가 없어 직접 연구하다보니 복식사까지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한국복식사연구》(1974)입니다. 국문학자가 복식사라? 언뜻 잘 연결이 안 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수님 스스로 국문학자의 여기(餘技)로 복식사를 했노라고 하며 웃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연구 수준은 독보적인 것이었습니다.


국문학자가 담배 연구라? 역시 마찬가지로 연결이 잘 안 됩니다. 제가 언감생심 김동욱 교수님의 수준에 견줄 수는 없으나 국문학자의 여기로라도 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담바고 문화사》에서 한 절을 춘향전으로 설정하고 춘향, 이도령, 월매가 골초임을 밝혔고, 등장인물의 절반 이상이흡연자임을 밝혔습니다. 소설 연구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만 춘향전을 이해할 때 흡연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흡연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는 점이 춘향전의 위대한 문학적 가치를 설명하는 하나의 징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이 책을 냈습니다만 흡연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책이 한국 흡연의 역사를 계통을 세워 다룬 본격적 저술의 시초라는 가치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세계의 흡연, 동아시아의 흡연 문화를 언급하는 외국학자의 논문이나 저술에서 한국은 그냥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한국 연구자의 무관심이 낳은 결과입니다. 역시 이제는 그런 수모를 받지 않아도 될 작은 근거는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담배뿐이겠습니까? 그처럼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의미 있는 크고 작은 주제들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훈상이 그런 주제를 탐구하려는 연구자들의 노력에 용기를 북돋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수상소감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지훈 선생의 《채근담》을 펼쳐 보았습니다.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학문 하는 사람은 마땅히 정신을 가다듬어 한길에 모아야 한다. 만일 덕을 닦으면서 뜻을 일의 성공이나 이름 내는 것에만 둔다면 결코 참된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요, 책을 읽으면서 읊조리는 재미나 풍류에만 감흥을 일으킨다면 결코 핵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읽어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번역입니다. 지훈 선생은 이 글에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 모든 공부의 바탕이다.… 공명(功名)과 풍아(風雅)는 공부하는 이의 부수입이 될지언정 본업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첨언하셨습니다. 학자에게 귀중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앞으로도 공부의 바탕을 점검하고, 부수입에 곁눈질하지 않고 본업을 진중하게 일궈가겠습니다.


제게 지훈상의 영광을 주신 나남출판 대표이사님과 지훈상운영위원회 심사위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축하와 격려를 하기 위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흐트러지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대회

심사평

우리 심사위원들은 제 16회 지훈국학상 수상작으로 안대회 교수의 《담바고 문화사》(문학동네, 2015)를 만장일치로 선정했습니다.


2016년 3월 29일, 인사동 풍석원에서 처음으로 모인 이후 심사위원들은 수상작이 될 만한 저작 선정을 위해 각자 생각하는 목록을 교환하고 내용을 검토했습니다. 최근 3년 이내에 출간된 문사철(文史哲) 저작들은 물론 국학과 관련 있는 사회과학 분야의 저작들까지도 살펴보면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학과 사학 분야를 중심으로 노작(勞作) 서너 권을 추렸고, 4월 28일 풍석원에서 다시 가진 모임에서 안대회 교수의 《담바고 문화사》를 국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의 《담바고 문화사》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기호품의하나로 자리 잡은 담배의 역사를 치밀하게 고찰한 역작입니다. 구체적으로는1609년부터 1910년까지 300년의 역사를, 담배를 중심에 놓고 살핀 문화사이자풍속사, 생활사, 그리고 정신사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담배의 도래’, ‘원하고 원망하다’, ‘명품과 취향’, ‘담배와 모럴’, ‘담배와 경제’, ‘예술 속 담배’, ‘구한말 흡연 문화의 격변’ 등 모두 7가지 주제를 기둥으로 삼아 담배와 관련된 한국인들의 삶과 생각을 다양한 층위에서 흥미롭게 천착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 책이 지닌 다음과 같은 장점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첫째,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저자가 인용, 활용한 자료의 방대함과 다양함입니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연대기 자료는 물론, 조선,중국, 일본 지식인들의 문집, 각종 신문류, 각종 회화류, 심지어는 최근 OECD에서 제시한 통계자료까지 종횡으로 구사하면서 담배와 관련된 역사를 풀어냈습니다. 특히 역사서로서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자가 야담(野談), 만록(漫錄) 등은 물론, 수많은 시(詩)를 자료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문집에는 많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지식인들은 시가 지닌 운문(韻文)으로서의 함축성을 활용하여 상소(上疏)나 차자(箚子) 등의 산문을 통해서는 드러내기 곤란한 자신의 속마음을 표출하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조선의 사회와 인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역사 연구자들은 시를 사료로서 거의 이용하지 않은 채 간과해 왔습니다. 탁월한 한학자인 저자는 수많은 시들을 사료로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이 책의 수준을 높였음은 물론, 역사 연구자들에게 학문적 자극을 주었습니다.


둘째, 만만치 않은 사실과 담론들을 숱하게 담고 있는 연구서임에도 술술 읽히는 이 책의 가독성(可讀性)입니다. 종래 대부분의 역사책들, 특히 조선시대를 다룬 연구서들은 수많은 한문 각주들로 뒤덮여 있어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읽어 내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한편, 이른바 대중 역사서들 가운데는 전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채 검증되지 않은 ‘명쾌하고 과감한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책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 안대회 교수는 중요한 사실이나 분석을 제시할 때마다 미주를 통해 전거를 꼼꼼하게 밝힘으로써 연구서의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평이하고 유려한 서술을 통해 이 책을 재미있는 교양서, 대중서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평소 다양하고 방대한 문헌자료를 섭렵한 바탕 위에 안 교수 특유의 강기(强記)와 박식(博識), 그리고 유려한 문체까지 어우러진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수많은 새로운 사실, 흥미로운 일화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정약용의 호인 다산(茶山)이 담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골초’가 흡연광이었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에게서 유래했다는 것, 정조가 모든 백성들을‘흡연의 쾌락’으로 이끌고자 했다는 것, 춘향전이 담배와 관련된 문화사의 보고(寶庫)라는 것, 담배 값의 변동을 통해 조선후기의 물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등, 독자들은 ‘신선의 풀’이자 ‘윤리도덕을 흐리는 요물’이었던 담배를 매개로 조선후기의 정치와 외교, 사회와 경제, 생활과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면면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대회 교수는 《담바고 문화사》 이외에도 그동안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천년 벗과의 대화》, 《정조의 비밀편지》,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등 다수의 논저를 발표했고, 《북학의》를 비롯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데 노력해 왔습니다. 안 교수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자칫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다채로운 면모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고, 사료 활용의 폭과 관련하여 전문 역사 연구자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담바고 문화사》는 안 교수가 그동안의 연구와 저술활동을 통해 온축한 내공을 집대성하여 보여 준 탁월한 성취인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 그리고 일본의 유명 서점에 가면 다양한 문화사, 생활사 관련서적이 즐비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문화사, 생활사 관련 서적들은 양과 질의 측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형 서점의 서가에 진열된 이 분야의 책들은 번역서가 대부분입니다. 안대회 교수의 역저 《담바고 문화사》의 등장을 계기로 우리 서점에도 수준 높은 문화사, 생활사 관련 책들이 즐비하게 꽂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제 16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박길성
심사위원 조성택・한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