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남찬순의 세 번째 시집 《나의 항복문서》가 나남출판에서 출간되었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삶의 바닥을 그려 낸 기억의 풍경첩과도 같은 시집이다. 이 땅 위의 모든 이가 짊어진 삶의 고통 그리고 기쁨에 대한 성찰과 반추가 눈부시다.
◉ 책 소개글
‘일상’과 ‘기원’과 ‘역사’의 트라이앵글
시인 남찬순이 《저부실 사람》, 《바람에게 전하는 안부》에 이은 세 번째 시집 《나의 항복문서》를 나남출판에서 출간하였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사랑과 그리움의 오랜 시간을 소환하며 내밀한 삶의 바닥을 그려 내었다. ‘길’이라는 키워드를 일생동안 질문해 온 시인은 이번 에도 우리네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거슬러 오르며,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 가려는 의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나의 항복문서》는 수많은 고난을 넘어서며 인생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미학적 페이소스로 가득한 실존적 기록이라 할 만하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유성호 평론가는 이러한 그의 시 세계를 두고 “일상과 기원과 역사의 트라이앵글”이라 평하였다.
존재론적 기원으로서의 고향을 찾아서
또한 시인은 ‘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존재론적 기원으로서의 고향을 호출한다. 그리하여 실향민과도 같은 현대인에 대한 가없는 마음을 노래한다. 그 과정에서 남찬순은 전형적 서정시인으로서의 단정하고도 견고한 매무새를 보여 준다. 그는 시를 통해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존재론적 기원을 탐색하는데, 그 시원이란 “색 바라고 귀퉁이 찢어지고 손때 묻어 있는 푸른 날의 사진”(〈망각의 길〉)처럼 아름다우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천년의 사랑이/ 곱게 깔려 반짝이던/ 그곳”(〈남태평양 섬나라 얘기〉)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그의 역동적 언어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그 길을 동행하게 만든다.
◉ 책 속에서
잊는 것도 잃어버리고 가는 것도 모르고 하얀 깃발 흔들며 홀로 걸어가는 망각의 길. 항복의 길. 부디 달빛 한 줄이라도 비춰 주십시오. 봇짐 속 사진 꺼내 들고 웃으며 가고 싶습니다.(〈망각의길〉 중에서)(13쪽)
내 앞에 놓인 길은 한 뼘인데/ 망령은 남은 삶을 미끼로/ 마지막 도박을 하라고 하네./ 욕망의 사슬로/ 투기꾼처럼 몰아붙이네.(〈길〉 중에서)(21쪽)
나는/ 비탈진 바위에 걸터앉아/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길을/ 망연히 떠올리고 있네.(〈돌로미티에서〉 중에서)(28-29쪽)
네가/ 물결에 출렁이는 낙엽처럼/ 갈 곳 잃어 풀섶에 엉켜 있어도/ 갈 곳 없어 바위틈에 끼어 있어도/ 나는 너를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그대는 떠나가고〉 중에서)(47쪽)
산등성이 휘감던 격정도/ 또한 한때였다.(〈송추의 겨울 노래〉 중에서)(49쪽)
아지랑이 기억과 씨름하는 일/ 컴퓨터 만지다 혼자 화내는 일/ 빨간불 깜박이면 병원 챙기는 일(〈요즈음 살이〉 중에서)(62쪽)
한평생 마음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그리움입니다. 황량한 벌판에도 멀리 별빛 마을이 있겠지요. 만나 주기만 한다면 깊이 간직했던 미안하다는 말, 꼭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문고리를 잡고 지나간 삶이 서러워 입술을 깨물겠지요.(〈늙은 나무의 참회록〉 중에서)(71쪽)
한세상 인연이 그림이군요./ 영원히 흘러가도/ 우리의 작업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붓을 놓지 않겠습니다.(〈아내 칠순 날에〉 중에서)(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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