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의 시인 박규리
그가 내놓은 20년 만의 신작!
박규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사무치다》가 나남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을 낸 지 무려 20년 만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고통의 바다’(苦海)와도 같은 세상 속에서 시인은 존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을 품어 오며, 이를 총 66편의 시에 풀어냈다. 세속과 초월 모두를 끌어안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결국 “너도 나도/ 구분 없는 적멸의 자리”(자서 중에서)를 마련한다.
▎책 소개글
박규리 시인의 20년 만의 신작
박규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사무치다》가 나남시선 97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를 낸 지 무려 20년 만이다. 전작에 수록된 〈치자꽃 설화〉, 〈성자의 집〉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가 기나긴 ‘안거’(安居, 불교 수행자가 오랜 기간 한 공간에 들어 수행하는 일) 끝에 돌아와, “외롭고 황량한 삶의 비탈길”(〈안거, 만장〉)에 머무는 존재의 아픔을 시로 승화한다. “마음에도 세상에도 안과 밖은 없었다”(〈정말일까>)고 말하는 시인에게 피아(彼我)를 나누는 일이란 무의미하다. 박규리의 시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이므로 타인이 겪는 고통은 즉 내가 겪는 고통이다. 그리하여 시집 《사무치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슬픔을 ‘적멸’(寂滅, 불교에서 이르는 절대 평화의 경지)로 승화시키려는 “구도의 몸부림이자 고해서”(정희성 시인의 추천사 중에서)와 같다.
모든 존재에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시인에게 존재란 곧 가여운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사물에까지 닿는다. “가진 것 다 잃고/ 절집 아래 빈 토굴에”(〈달밤〉) 들었음에도 다시 삶을 각오하는 남자, “무참한 이별의 상흔과 한 생의 뜨거운 열기”(〈늙은 개〉)를 품은 채로 목줄에 매인 개, “새하얀 눈물 환하게 밝”(〈구절초〉)히며 피어난 한밤의 구절초 꽃, “출렁이는 파도와 한 몸이듯”(〈조각배〉) 격랑 속에서도 의연한 조각배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모두에게서 “환희와 욕망, 비탄과 절망”(〈화산〉)을 본다. 시인 박규리에게 시란 구름 위에 앉아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의 눈은 온전히 이곳 지상에 머문다. 오랜 세월 불가에서 공양주로 지낸 이력이 있는 그에게 세상은 ‘고해’(苦海, 불교에서 가리키는 인간 세계)와 다름없다. “천하고 속된 것들 다 저버리고 성스러운 건 없다”(〈성스러움에 대하여〉)고 쓴 시인은 그렇게 고통의 바다 한가운데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노래한다. 그러므로 박규리에게 시를 쓰는 행위란 그 모든 존재를 향한 연민이자 사랑, 즉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慈悲)를 베푸는 일이다.
세속과 초월 모두를 끌어안는 시선
그러나 시인에게도 삶은 녹록하지 않다. 마음속 꿈틀대는 욕망으로 인해 좌절하고 한탄한다. “이 세상 천형 아닌 것 없”(〈저녁을 지으며〉)다고 단정하며 이럴 바에 “다시는 아주 태어나지 말”(〈안거, 슬픈 초인〉)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 앉은 자세를 고쳐, 고행자의 눈으로 삶을 직시한다. 뼈에 사무칠 때까지 지상에 넘실대는 고통을 멀리 가늠하고 깊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만났다 이별하고 홀로 남은 사람들”(〈구절초〉) 속에서 “저것들 다 품고 가는 일이 이 지상에서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쓸쓸한 천형이요, 하마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업”(〈천형〉)이라 말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지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박규리의 시집 속 세계는 봄비가 “괜찮으냐고/ 괜찮으냐고”(〈안부〉)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늙은 소나무가 “괜찮다고/ 괜찮다고”(〈그렇게 또 사무쳐 오르면 된다고〉) 사람을 다독이는 세계다. 세속과 초월 모두를 끌어안는 자비로운 시선이 “너도 나도/ 구분 없는 적멸의 자리”(자서 중에서)를 끝내 마련한다.
▎책 속에서
술 한 병 옷섶에 품고
미친 척 스며들고 싶어라
그대 갈비뼈 아래
그 빈방으로
- 〈오늘처럼 매화 흐드러지는 날이면〉 전문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슬픔이 뼈에 사무쳤다 마냥 열에 달떠 신음하고 가끔은 차갑게 식어 온몸을 떨었다 달 없는 한밤 흔들리는 자작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면 법당 뒤로 들려오는 노루 울음소리가 깊고 길었다
- 〈사무치다〉 부분
…
그러다 문득 마지막 그날이 오면
잠결에 자던 베개 하나 옆구리에 끼고
슬그머니 건넛방으로 넘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 〈아무렇지도 않게〉 부분
…
나는 없는데, 나를 이루고
세상을 가득 채운 이것들,
아무리 살아도 세상 모퉁이 돌 때마다
뼈저리게 아픈 병 끝을 딛고
오늘, 다 같이 뜨는 한술 밥
- 〈한술 밥〉 부분
벚꽃 지니 복사꽃 환합니다
눈 감았다 실눈 뜨니 봄날이 다 갔습니다
- 〈봄날의 반가사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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