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 2009 겨울호
[새로 읽는 시와 산문] 아름다운 보물들
나는 작년 8월 31일 고려대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30년 동안 교수로 있으면서 겪은 일은 그동안 틈 있을 때마다 많이 토로해왔으므로 그러저러한 나의 이야기는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정년을 맞이하면서 아무 행사도 안 하면 30년 동안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받아먹은 꼴로 비칠 것 같아서, 좀 이상한 정년퇴임식을 마련할 궁리를 했다. ‘이상하다’는 것은 진짜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무나 허투루 하는 그런 행사가 아니라 내 딴에는, 내 고집대로 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모두들 그걸 아니까, 나 하고 싶은대로 멋대로 하려고 궁리했다. 아무 행사도 안 하려고 했는데 제자들이 강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획과 진행을 뒤에서 다 조종한 셈이었다.
정년에 맞추어 《입품 방아품》이라는 자전적인 책 한 권을 내게 되었고 시론집 《헛똑똑이의 시 읽기》라는 책도 묶게 되었는데 정년 날짜를 코앞에 둔 8월 스무 며칟날,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었다. 정년기념논문집이니, 내가 본 오 아무개니 하는 류의 책은 애당초 낼 생각이 없었다. 4만 5천 원짜리 스테이크 저녁식사와 행사비 일체는 내 제자들이 맡았고 나는 책값을 부담하였다. 《입품 방아품》은 650쪽이나 되는 500부 한정판 비매품으로 만들었는데 책값을 매기면 한 5만 원쯤은 되려나 그 정도의 볼륨이었고 《헛똑똑이의 시 읽기》는 양장본 300쪽이었는데 고려대 출판부에서 책값을 1만 9천 원으로 매겼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참석한 이들에게 7만 원 가까이 나가는 책을 350권씩, 도합 7백 권을 기증하였다. 단순한 책이라기보다는 나의 온갖 개인사個人史와 문학을 향한 눈높이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나의 일생’을 몽땅 공으로 준 것이다. 35년 동안 해온 교수로서의 보람과 좌절 그리고 천등산 아래 박달재 아랫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흑백사진을 구겨지고 빛바랜 채로 숨김없이 제공한 것이었다.
공으로 밥 먹고 술 마시고 책 두 권씩 받아간 이들이 그 후 대접 잘 받았다든가 책 잘 읽었다든가 하는 인사를 제대로 하는 경우가 없었다. 세상인심이 다 그런 것임을 어찌 모르랴만 속으로는 좀 창피하였다. 그 옛날 신춘문예 3종 3연패라는 명예가 살다 보니 ‘명예’가 아니라, ‘멍에’가 됐다는 말을 내가 자주 했지만 그날의 정년퇴임 출판기념회도 또 하나의 멍에가 됐구나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 그래, 너 잘났다. 이런 소리가 귓전에서 닝닝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원서헌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나남의 조상호 사장이 보낸 편지였다. 그와는 그날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소감을 만년필로 쓴 안부 편지였다. 출판기념회에서의 만남을 ‘황홀한 만남’이라고 말하는 그가 괜히 미운 생각도 들었다. “고려대와 오탁번 그리고 접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내 입에서는 저절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 아이고, 사람 죽이네! 나는 이런 꼬임에 한두 번 당한 사람이 아니다. 주변 환경이 묘할 때면 고려대와 오탁번을 무슨 야릇한 숙명처럼 설정해놓고 헛박수 치다가도 좋은 때가 오면 나 모르게 알을 나눠 먹는 고려대학교가 아니던가.
그와 나는 한쪽이 혜성이면 다른 쪽은 행성이 되고 또 다른 쪽이 행성이면 한쪽은 혜성이 되는 우주적 미완성의 관계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의 편지를 내 서재의 고비에 잘 끼워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후 1년이 지난 이번 가을, 그에게서 책 한권이 왔다. 450쪽이 더 되는 《언론 의병장의 꿈》이었다. 나남출판 창립 30주년과 조상호 사장 회갑을 기념하는 문집이었다.
나남이 벌써 30년이 됐나? 아니, 벌써, 조상호가 예순한 살이 됐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다가, 제1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한 시간들〉이라는 장에 그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출판문화에 대한 솔직한 논평, 편지 등이 수록돼있는데, ‘순은의 아침의 시인’이란 꼭지에 작년 9월에 나에게 보냈던 편지글이 고냥 수록돼있는 걸 보고 놀랐다. 내가 받은 편지는 분명히 만년필로 쓴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보내는 편지마다 한 벌 더 베껴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복사라도 해 놓았었단 말인가. 요즘 어느 미술관에서 추사 김정희의 간찰(簡札)이 전시되고 있다는데 조상호도 옛 선비들처럼 편지 한 장 보내면서도 한 벌을 또 따로 써서 보관했었단 말인가.
이번 그의 책은 흔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책이 아니다. 아주 살갑게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하나도 뽐내지 않으면서도 숨김없이 정직하게 드러내는 참 희한한 책이다. 출판(出版)은 물론 학문(學問)과 문화(文化)와 정책(政策)까지, 게다가 시서화(詩書畵)에 주역(周易)까지 모든 문을 두드려 열고 있는 그의 부지런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했거늘, 문이 어디 있다고?
나는 《언론 의병장의 꿈》에 수록된 다음 글을 읽으면서 조상호 사장이 왜 서사적인 전망이 소설가보다 더 뛰어난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꿈꾸는 것은, 결혼식 주례를 섰던 그의 은사 이희봉 교수와 고향 집에서 다시 전통혼례를 올리게 한 그의 대쪽같은 아버지가 상호 모순대립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식을 두 번 올린 그는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의 주인공과도 같다.
그가 보물로 지니고 있는 서예(書藝) 작품들은 바로 그가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지닌 보물을 나는 한동안 ‘그’가 된 듯 넋 잃고 바라보았다. 이처럼 보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그의 선천적 기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몇 개의 보물을 더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제일 소중한 보물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다 내보이지 않는다. 다 말하지 않는다. 호시우행(虎視牛行) 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
1977년 10월 2일 결혼을 했다. 그때는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법정 공휴일이었으니 10월 3일 개천절의 연휴에 낀 날이다. 지금처럼 사생활을 우선하기보다는 친구의 정을 더 생각하는 낭만적인 시절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붓집인 대구까지 오게 했으니 미안한 일임은 틀림없다. 그때 우리 모두는 가정에 얽매이지 않은 젊은 그들이기도 했다. 주례는 친족상속법의 대가인 법대 스승 이희봉 선생님이 맡으셨다.
예식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아버지가 오시지 않았다. 처가 식구들이 동요하는 듯하고, 예식장 사람들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듯했다. 대구로 오고 계신 것은 틀림없는데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 오시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애를 태웠다. 장남 혼사인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얼마나 애를 끓고 계신 건가. 주례인 이희봉 선생님이 혼주가 참석하지 못한 혼인을 치르기로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대구 며느리를 맞기 위해 버스를 대절하여 동네 어른들과 먼 길을 나섰다. 광주-대구 고속도로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대전을 거쳐 다시 대구로 오는 고속도로를 택하지 않고 전라도에서 경상도를 질러오는 국도를 번갈아 탔다고 한다. 오던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의사인 박의재 박사를 뒤처리 겸 볼모로 현장에 남기고 식장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예식이 끝나고도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같이 온 동네사람들에 대한 체면도 그렇거니와 처음 와 보시는 대구까지 달려왔는데도 결혼식을 지켜보시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또 한 번 불효를 저질렀다. 아버지가 화내시는 것도 지쳐 갈 무렵 이희봉 선생이 주례를 잘못한 죄를 어르신께 용서를 구한다면서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아, 스승님 죄송합니다.
촌부 앞에 자식의 스승이 무릎을 꿇자 아버지가 더 황망해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이 신식 결혼식은 그렇다 치고 일단 신혼여행을 다녀와 고향에서 다시 전통혼례를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버지의 자존심을 누그러뜨렸다. 아내와 장인어른은 풍습도 다른 우리 동네에서 또 한 번 혼례를 치른다고 마음고생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내가 혼례를 두 번 치른 연유이다.
신행을 다녀와 인사를 드리러 선생님을 찾았을 때 나에게 준 선물이 이 글이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내 이름자가 박힌 글이었다.
그렇게 곤욕을 치른 유별난 혼인의 주례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내 삶의 영원한 스승님으로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와닿았다. 1년에 몇 번씩 성북동 선생님 댁을 찾아뵈며 가르침을 받았다. 사모님께서는 젊은 새댁을 따로 불러 서울 딸깍발이의 내훈(內訓)을 하시는 것 같았다. 부부에 대한 이 아름다운 교육은 선생님이 병마에 쓰러지시기 전까지 10여 년 넘게 계속되었지 싶다.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天乎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늘을 원망하지 말며 사람을 탓하지 말라. 다만 아래로 배워서 위로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인가 보다!”라는 뜻으로 읽었다. 《논어》 헌문(憲文) 편 37장의 말씀으로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라는 공자의 한탄에 제자 자공(子貢)이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의 답변이 위와 같았다(子曰 莫我知也夫인저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잇고 子曰 不怨天하며 不尤人이오 下學而上達하노니 知我者는 其天乎인저).
신혼의 작은 살림집에서부터 이 큰 뜻의 액자를 모셔왔다. 건방진 생각이 들거나 주변의 같잖다고 생각되는 일에 좌절할 때마다 인생훈(人生訓)으로 삼았다. 결국은 하늘이 알아줄 텐데 조급하게 뭔가 이루려고 안달하거나, 조금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으며 뜻을 이루려는 노력을 호시우행(虎視牛行)의 그 걸음으로 계속하여야 한다는 추동력이 그것이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았고, 기댈 곳도 없는 어려운 시절이었는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는 표현이 희망의 북극성처럼 긴 세월을 버티게 해준 것 같다.
몇 년 전 결혼 30주년 기념의 가장 큰 일로는 이 액자를 깨끗하게 다시 표구하여 사무실 복판에 걸어 놓는 일이었다. 30여 년 전 선생님의 그 모습이 생생하고, 이 글의 뜻이 더욱 새로워 보인다.
2
1981년 7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의 단하(丹霞) 김영두(金永斗) 선생 퇴임기념논문집 《단하산문론습진》(丹霞散文論拾集) 출간기념으로 받은 선생의 친필이다.
奈南出版趙相浩 印刊此集華麗豪 深謝且祝法學士 高大緣分如是乎
이렇게 책을 화려하게 출판해주어 매우 감사하고, 더욱 기쁜 것은 나는 정치과 교수인데 법과대학 출신인 당신이 이 책을 출판해 주었다니 고려대학의 연분이 이러한 것인가 싶어 기쁘다는 뜻이다.
편집직원도 따로 없던 출판사 초창기의 앞뒤도 가리지 못한 시절, 김중위 선배의 강권으로 한자투성이의 대작을 소화했다. 한두 달을 밤새워 교정보면서 내가 이 책을 꼭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회의에 빠지면서도 나를 믿고 맡겨준 형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시 일어서면서 이 책을 만들면서 출판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출판이 사람과 사람과의 특수관계인 업(業)이라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김영두 선생은 강의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하얀 고무신을 신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도인풍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다.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로서 설악산 하계등반 때 조난사고로 여러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고 비통해했던 기사도 생각난다. 불교사상에 밝았고 퇴직 후에는 증산교 교리연구에 몰두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뵙기도 했다.
과작이기도 했지만 글씨가 지금 보아도 너무 좋다. 붉은빛의 안개라는 호 丹霞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 뜰 무렵의 해를 숨긴 안개인지 해 질 무렵의 그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주신 선생의 선시(禪詩) 여러 편도 함께 표구해 두고 감상했지만 출판사에 들른 선배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이 글씨만 30년 가까이 보관하고 있다. 내 이름자가 박힌 글이어서 겉멋에 흐른 선배들의 마수에서 살아남은 셈이다.
출판사의 주력상품이 언론학과 사회과학이었기에 나를 국문학과나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줄 알았더니 법과 출신이구먼, 하는 필자들의 의아함도 이 글씨 때문에 알려졌다.
한시의 운(韻)을 맞추기 위해 출판사 이름을 ‘奈南’으로 쓴 것이 특이하다. 선생께서는 한글인 회사 상호를 자의적으로 한문으로 쓴 것을 미안해하면서 뜻풀이를 해주었다. 어조사 奈는 나폴레옹[奈翁] 같은 불굴의 용기를 뜻하며, 南은 남쪽 기름진 들녘의 뜻이니 회사로서 비즈니스도 잘 되라는 의미라고 하여 고맙게 받아들였다.
3
금년에 정년퇴직을 하는 고대 국문학과 송하춘 선배의 창작집 《은장도와 트럼펫》(작가론: 忍苦의 무르익음과 바람기의 노래 ― 김화영)을 출판한 것은 1987년이었으니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송 선배는 책이 나오고 한참이 지났는데 아버지에게서 받았다며 불쑥 이 글씨를 내밀며 계면쩍게 고마움을 전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의 풍죽(風竹)이 그것이다.
抱節不爲霜雪改 成林終與鳳凰期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듯이 전주의 강암 선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인지를 내가 모를 때였다. 항상 지나치면서 ‘그 글씨 참 좋다’고 했던 고속도로 전주 입구의 湖南第一門이라는 8차선 위의 누각에 걸린 커다란 현판도 강암 선생의 작품이었다. 그저 아버지의 애틋한 정으로만 알고 받았더니 김화영 교수가 이를 보고 그렇게 부러워했다. 전주까지 찾아가 친구의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고 어렵게 풍죽(風竹) 그림만을 받고도 감격했는데, 당신은 강암 선생의 풍죽 그림에 글씨까지 받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나중에 선생의 장자인 성균관대 송하경 교수의 전시회에서 풍죽 그림을 보면서 내가 받은 강암 선생의 글과 그림만이 아니라 그 뜻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어느덧 회사보물 2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전의 강암 선생에게서 한 자 한 자 공들여 받아 예술작품으로 출판한 불이출판사의 〈강암 천자문서(千字文書)〉를 어렵게 구해 머리맡에 놓고 강암체(剛菴體)를 닮고 싶어 붓글씨 공부를 20년 넘게 하고 있지만 아직 먼발치에도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그 그림자도 밟지 못한 것 같다.
화제(畵題)는 “포절불위상설개(抱節不爲霜雪改) 성림종여봉황기(成林終與鳳凰期)”로 중국 당(唐)나라 시인 나업(羅業)이 대나무를 찬미한 “竹”이라는 칠언절구의 일부이다. 강암 선생은 아마도 이 글을 ‘출판계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처음 품었던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를 영원히 변치 말고, 대업을 이루었다 해도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에서 풍죽(風竹) 그림과 함께 이 화제를 쓰셨을 것이다.
특히 대가(大家)의 화제에 ‘나남’ 출판의 상호가 한글 ‘나남’ 그대로 적힌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연구대상이라고 했지만, 나는 선생께서 한자로 작명을 못 해서도 아닐 것이지만 젊은 출판장이의 고집을 그대로 존중해 주신 대가다움의 큰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 글씨를 해독하는 데는 10여 년이 걸렸다. 오가는 수많은 선배들에게 내 방에 걸린 이 글씨를 자랑하면서 이 글의 의미를 알려고 했지만 우물우물 넘어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생 생전에 여쭈어봐야 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지만 쑥스럽기도 해서 차일피일하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찾았다. 《주역》 공부도 한 2년 같이 했던 제4회 〈지훈국학상〉 수상자인 이형성 박사가 원전을 찾고 풀이까지 해주었다. 《조선왕조실록》만 그런 줄 알고 감탄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중국에서도 고전인 당송(唐宋)의 명시가 이미 원전 그대로 컴퓨터에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딴에는 하도 어렵게 찾은 자료라서 그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翠葉纔分細細枝 淸陰猶未上堦墀 蕙蘭雖許相依日 桃李還應笑後時 抱節不爲霜雪改 成林終與鳳凰期 渭濱若更徵賢相 好作漁竿繫釣絲
푸른 대 잎 조금 분명하지만 줄기는 가늘고 가늘어 서늘한 그늘 여전히 섬돌에 오르지 못하네 혜초 난초 비록 의지할 만하다 허여한들 복송 오얏나무 여전히 후시절 비웃네 절개 고이 품어 서리 눈발에도 변치 않고 푸른 숲 이루어 끝내 봉황으로 기약하네 위수 물가에서 다시 어진 재상을 구한다면 낚싯대로 잘 만들어 낚싯줄을 매리
글 | 오탁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