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다] "사무쳐야 한다, 너를 다시 보낼 때까지"
매체명 : KPI뉴스   게재일 : 2024.07.05   조회수 : 36

2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사무쳐야 한다' 펴낸 박규리

공양주보살로 살며 펴낸 '이 환장할 봄날에'로 주목

선 공부하며 강단과 집 오가는 '안거'의 긴 침묵 끝에

신경림의 마지막 문자메시지에 답하며 터져나온 시들

 

이 폭설 속에서도/ 남녘 어디선가 매화가 피었다 한다// 다 늙은 내 젖도/ 슬그머니 부풀어 오른다 _ '오래된 시' 전문

 

박규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사무치다'(나남)를 펴냈다. 작은 절집의 공양주로 살면서 펴냈던 '이 환장할 봄날에' 이후 20년 만이다. 오랜 '안거' 끝에 다져진 내공으로 '환장할' 격정은 수그러뜨렸지만 복류로 흐르는 뜨거움은 여전히 숨길 수 없다. 남녘 꽃 소식에 마르고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부풀어오르는 건 살아 있는 한 거세할 수 없는 갈망일 터이다. 매화뿐이랴. 겹동백은 붉게 여러 겹 치마를 두르고 춤을 추더니 봄과 함께 떠나가면서 시인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나를 후리고 내 혼줄 다 빼 놓고는// 엄동설한에도 겹겹이 두른 치마/ 들추지 못해 환장이더니 천년만년/ 내 곁에만 살 것처럼 정분질이더니/ 봄바람 타고 줄행랑쳐서는/ 젠장할 이 산에서도 저 산에서도/ 요망한 속곳 훌러덩 다 까집고는/ 나부끼고 있네/ 벌겋게 나부끼고 있네 _ '겹동백' 전문

 

20년 세월이 흘렀다고, 아무리 선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각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고하던 '치자꽃 설화'의 출렁이던 바탕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 시로 증언하는 셈이다.

 

그가 처음 절에 들어간 것은 첫 시집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공간이 필요해서였다. 정작 절에 가보니, 너무 가난하고 스님은 천사 같아서 그곳에 들른 이들은 너나없이 절집 살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서울 태생으로 자연을 제대로 접해본 적도 없었던 그가 활자 중독에서 벗어나 밭을 매고 공양을 지으며 그냥 그대로 절에서 8년을 보낸 뒤, 그제야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를 펴냈다. 공양주보살로 절집에서 응축한 시정을 폭발하듯 터뜨려 3개월 동안 써낸 시들이 중심이었다.

 

이 시집을 두고 신경림 시인은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 그 양면을 함께 지녔다"면서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다 보고 있는 눈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덕목일 터 인데, 그럼에도 그의 시는 한없이 젊고 풋풋하다"하다고 상찬했다. 그를 정희성 시인과 함께 '민족예술'에 등단시켰던 신경림은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면서 "누가 앞으로 칭찬한다고 혹은 비방한다고 절대 흔들리지 말고 이대로 죽 나가면 된다"고 격려했다고, 시인은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인다.

 

이후 오랜 '안거'의 세월 속에 시집 소식이 들리지 않자 신경림 시인은 지난해 말 '나 살아 있을 때 내라'고 문자메시지 안부에 마지막 답장을 보내왔다. 그가 서둘러 펴낸 이번 시집은 끝내 선생에게 드리지 못했다. 대신 시집 마지막에 '낙타에 부쳐'라는 조시를 붙이는 것으로 슬픔을 다독여야 했다.

 

이번에는 먼저 떠난 신경림 대신 정희성 시인이 "세상의 아픔과 슬픔, 삶과 죽음, 세속과 초월에 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구도의 몸부림"이며 "초월적인 진리 속으로 영영 침잠한 줄 알았던 그가 제 속에 천형(天刑)과도 같이 들끓던 욕망과 삶 그리고 죽음의 근원적인 의문을 떨치고 마침내 그것들을 끌어안고 함께 가는 길을 열어 보이는 눈물겨운 역정"이라고 시집 뒷표지에 썼다.

 

빛 좋은 날, 곰팡내 눅눅한 스산한 비애와 아직 다 꾸덕꾸덕 마르지 못한 짓무른 눈물과 잔가지 하나둘 썩어 가도 기어이 꿈틀대며 살아 숨 쉬는 뿌리까지 바람결에 내다 말리네 저것들, 저것들 다 품고 가는 일이 이 지상에서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쓸쓸한 천형이요, 하마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업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네 _ '천형' 부분

 

"늙어서 아프고 내 몸이 부서져 내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사랑했던 것들이 떠나는, 이제 남은 것은 이런 상태를 겪는 일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아직 닥치지 않았으니 접어두고 지금 이순간의 기쁨과 환락을 부나방처럼 좆는 건데,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 뒤에 반드시 뒤따르게 되는 이별과 고통 이런 것은 없는 척하고 안 보는 거예요. 그래야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렇겠지만, 바로 그 고통이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 쓸쓸한 천형이고 아름다운 업인 거죠."

 

공양주로 절집에 스스로 갇혀 살 때는 신경림 시인이 빨리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곳에서 10년을 살다가 정작 첫 시집 내고 세상으로 나오려 하자 선생은 그냥 거기서 살라고 했다는데, 이번에도 시인은 청개구리처럼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절집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문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갈 것인지, 스님의 권유를 따라 공부를 할 것인지 망설이다 대학에 다시 들어가 선() 공부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대학에서 젊은 학승들을 가르치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선 공부에 매진해온 삶을 그는 '안거'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번 시집에는 안거 연작도 포진해 있다.

 

가을햇살에 꼬들꼬들 말라 가는 대추처럼 나도 언젠가 다 말라비틀어지면 차가운 방에 들어 차가운 막소주 한 잔에 몸과 마음 아주 부려지면, 세상 어딘들 이 몸 낭자하게 뿌려져도 다시는 천형의 서러움에 발목 빠지지 않고 다시는 숨어 울지 않고, 기어이 다시 떠날 그대 시린 발등 내 뜨거운 눈물로 적시며 그 생도 우리 함께 두둥실 흐를 것을 믿습니다 _ '안거, 그곳이 어딘들' 전문

 

그는 '이젠 그만하자, 그만하자, 그리 다짐해 놓고도 또 그립고 그리워 목메는 밤입니다 어디 내 마음이라고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안거, 그러려니' 전문)라고도 설파한다.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다 보면 슬그머니 관대해진다.

 

"이번 시집 시들도 첫 시집처럼 마지막에 터져나온 것들이에요. 가슴에 꾹꾹 눌러져 있던 것들이죠. 정말 마음이 편해진 상태에서 쓰고 싶었어요. 제 시가 약이 되는 시, 위로가 되는 시, 아픔을 치유하는 시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렇다면 제 아픔도 드러내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래서 이번 시집에는 젊었을 때 고통받았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선학을 강의하며 살고 있는 시인은 "선 공부를 하면서 '사무치다'라는 표현을 자주 접했다"면서 "깨달음까지 가는 구도의 수행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집중을 넘어서는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했다. 시를 쓰는 이가 선 공부를 하면서 접한 '사무치다'라는 치열한 구도의 어휘는 또다른 사무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너를 만나고 나를 용서하고 너를 다시 보낼 때까지 그러나 나는 한 번이라도 내게 진실했을까 얼마나 사무쳐야 아무런 불빛 없이 나를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사무쳐야 빛도 어둠도 없는 그곳에서 기어이 너와 하나 될 수 있을까// 앙상한 나무에 산 것들이 주검처럼 매달려 있더니, 갑자기 나뭇가지 하나 창을 깨고 들어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아직은 더, , 사무쳐야 한다고! _ '사무치다' 부분

 

예전의 격랑은 많이 가라앉고 맑아졌지만 아무리 선 공부를 해도 가슴 깊은 곳에 흐르고 있는 그리움은 그대로여서,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사무침의 대상은 ''로 응축되는 무엇일 터이다. 남녘 매화 소식에 '다 늙은 젖이 부풀고' 겹동백의 유혹에 가슴은 뛰는데, 환장할 봄날에 피던 '홍도화'나 세월이 흘러 '사무치다'에 물결치는 홍도화는 변함이 없다. ', 눈물겨운 이승의 적막밖엔 다시 흐를 게 없는 이 환장할 봄날, 텅 빈 허공만이 그대와 나 사이에 흐르고, 그 사이로 끝내 가닿을 수 없는 그대와의 지척엔 홍도화'('홍도화 붉은 물결뿐' 부분)

 

박규리는 "이제 떠날 건 다 떠났고, 남을 건 남았다"면서 "화인(火因)으로 남아 아주 떠나지 못하는 것들/ 내 살을 베어서라도 고이 천도(薦度)해 주고 싶었다/ 내가 낳았으니 내가 보내야 한다"'자서'(自序)에 적었다. 시인의 걱정.

 

텃밭에 심어 놓은 깻잎이 성한 데가 없습니다 누렇게 죽어 가는 숭숭 뚫린 구멍들이 수십 개도 넘습니다 일생 내가 파먹은 당신은 성하신지요 _ '걱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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