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자작나무숲에 산다
작성일 : 2025-07-29   조회수 : 229
자연의 생태계에는 겨울잠이 있다. 찾아올 새 봄에 성장의 꿈을 예비하는 디딤돌의 시간이다. 동물들만 동면(冬眠)에 드는 것이 아니고 나무들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겨울잠에 든다. 인간만이 계절의 감각을 넘나들며 부지런을 떤다. 수목원에 눈이 쌓이면 내게도 내 글을 쓸 수 있는 망중한(忙中閑)의 귀한 시간이 찾아온다. 〈나무 심는 마음〉과 〈숲에 산다〉의 기록은 이때의 결정(結晶)이다. 이번 겨울은 한가로울 수 없었다. 읽어내야 할 출판사 원고들도 많아졌지만, 2만 평의 잣나무 원시림의 벌목작업으로 수목원이 소란스러웠다. 초봄에 자작나무 묘목 2만 그루를 심을 터전을 닦는 일이었다.
내 나이 일흔 무렵에 시작하여 6년 동안 4차례로 나누어 자작나무 10만 그루를 심은 ‘수목원 시즌 2’의 대장정(大長征)이 일단락되었다. 나남수목원의 절반이 자작나무로 덮이게 되었다. 앞으로 3~4년간은 묘목을 키워내기 위해 해마다 두세 차례 잡풀을 베고 가지를 치며 넝쿨을 걷어내야 하는 예비된 자청한 노동이야 잠시 덮어두자.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고 했다. 미래를 마냥 기다릴 일만은 아니다. 준비하고 창조하기 위해서는 오늘 실천해야 한다. 광대무변한 자작나무숲은 여름에는 햇살에 출렁이는 잎들의 웅장한 교향곡이 산중을 물결치는 수해(樹海)로 만들 것이며, 낙엽이 지면 유난히 하얀 표피에 까만 눈동자가 또렷한 10만 대군의 열병식이 하얀 설원에 화려하게 펼쳐질 것이다.
나는 갈수록 거대해지는 그 초록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며 여름을 온몸으로 안으면 되고, 한겨울 10만 대군의 사열을 받으며 태고의 원시가 주는 감동을 같이하면 된다. 산신령이 다 되었다는 친구들의 부러워하는 질투에는 짐짓 염화시중의 미소라도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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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은 무더웠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임계치가 어디까지 인지를 실험하는, 체온을 넘어 계속되는 무더위였다. 우리와는 반대로 탄소를 먹고 산소를 뱉어내는 나무들이야 습기까지 가득한 찌는 듯한 이 무더위가 좋았을 것이다. 봄부터 가지치기를 하는 3천 그루 넘는 반송의 솔향기가 한창 짙어지고, 잘 자라는 자작나무를 위협하는 칡넝쿨, 다래넝쿨 제거에 여념이 없던 여름날이었다.
마침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5층 석탑(石塔)을 인사동에서 구해 인수전 앞에 모셔 수목원의 중심을 잡았다. 석탑은 쉽게 억대를 넘는다는데 1층 석계(石階)가 약간 파손되었기에 저가에 내 손에 들어왔다. 일부러 수리도 하지 않았다. 2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울리기도 했다. 이 탑을 조각한 이름 없는 석공의 사연이나 집념은 알 수 없다. 무영탑(無影塔)의 신화가 아니라면 호수에 비칠 탑 그림자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늘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5층 석탑 탑돌이도 하면서 한숨 돌릴 무렵, 얼굴에 대상포진(帶狀疱疹)의 습격을 받았다. 대개는 팔이나 몸뚱이에 온다던데 희한하게도 나는 콧등을 중심으로 이마에서 턱까지 왼편 얼굴 전체였다. 바이러스가 신경망에 침투한 신경염인지 신경그물 모습 그대로 열을 지어 분출한 14개의 분화구(噴火口)가 생겼다. 인체의 신비를 생각하는 여유도 부렸지만, 시신경까지 건들면 실명의 위기도 온다는 말에는 걱정도 앞섰다.
발병 원인도 못 찾는다고 했다. 작두 칼날 위에 발을 베이지 않으려 긴장하며 ‘없는 것을 찾는 젊은이’로 살았던 내 모습은 이제 70대도 중반을 넘어선 노인의 얼굴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기미도 느꼈다. 치료 방법도 특별하지 않았다. 분화구에 딱지가 질 때까지 서너 달 병원을 출입하며 통증과 가려움을 그저 참아내야 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고 대상포진 예방주사도 맞지 않았느냐는 당연한 물음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몇 년 전 병원에서 아내에게는 고가의 예방주사를 맞히면서도 나는 내 몸을 믿었던지 무심하게 지나쳤다. 이제 새삼스럽게 동네 노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마지막은 까맣게 변한 분화구 흔적을 지워내는 피부과 치료였다. 멀쩡한 얼굴의 성형 미용 돈벌이에 취한 피부과 병원에서 나 같은 진짜 환자는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대상포진의 분화구가 두 달이 지나 진정기미를 보이던 9월에는 10년 넘게 해오던 반송전지 작업 중에 전동가위에 손가락이 잘렸다. 왼손 넷째 손가락인 약지 2센티미터쯤이 달아났다. 워낙 몸에 익숙한 작업이었고 해찰을 부린 것도 아니라면 순발력이 예전 같지 않았나 보다. 처음 경험한 대상포진의 심리적 후유증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에 포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수목원에서 가장 가까운 포천 강병원으로 달려갔다. 40년 전에 읽었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시 구절도 떠올랐다. 전신마취가 지겹기는 했지만 두 차례에 걸친 3일간의 손가락 봉합수술이 끝났다.
손가락이 몽당연필처럼 뭉툭해졌다. 내심 살 만큼 살았는데 이렇게 살면 어떠랴 하고 스스로 마음에 두지 않으려 했다. 수목원의 제단에 바친 잘린 손가락이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의사 선생은 손톱의 뿌리는 살려 보았으니 살이 차오르면 예전 모습 비슷해질 거라고 희망을 주었다.
난생처음 입원실에서 며칠을 지냈다. 내가 환자고 아내가 보호자가 되어 고생했다. 간병하는 불편한 잠자리만이 아니고 강철무지개같이 살았던 남편의 어리숙한 뒷모습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내는 수목원에 가고 싶다는 나를 달랬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멀리 서울에서 찾아왔다.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가 의용소방대 사고로 쇄골이 부러져 입원한 병원을 처음 찾아가본 먹먹했던 마음도 겹쳤다. 니들 마음 안다는 생각에 눈물을 감췄다. 초라한 시골병원 입원실에 걸맞게 애비도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는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을 것 같아 계면쩍었다. 출판사 임직원들이 오지 않은 것은 다행으로 여겼다. 수목원 가는 길에 두세 달 병원 통원치료는 일상이 되었다. 퇴원하고서 알았지만 외과의사들이 손가락 봉합수술은 기피하는 분야라고 했다. 손가락 끝에 예민한 신경이 모여 있어 수술하고도 환자들의 컴플레인에 많이 시달린다고 했다.
수술 후 여섯 달이 지나자 쌀알만 하게 희미했던 손톱이 눈에 띄게 자랐다. 본래 모습의 절반쯤 되어 보인다. 그에 맞추어 새살도 돋기 시작하여 손가락 끝도 둥그런 모양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전히 수술한 손가락은 시도 때도 없이 아린다. 사람마다 아린 손가락이 있다는 말도 예사스럽지 않다. 나머지 손가락들로 더듬더듬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이 글을 쓴다. 한 해 동안 더 아린 손가락과 동행하다 보면 예전 모습 비슷하게라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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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에 허덕이던 이상한 여름날 6월에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도올 김용옥 선배였다. 저명한 명성이나 저술활동을 모를 리 없지만 이제까지 직접 뵌 적은 없었다. 38년 전 철학자들의 엘리티시즘을 추상같이 비판하는 혁명적 저술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고 받았던 신선한 충격만이 뇌리를 맴돌았다.
도올 선배는 예전부터 김준엽 총장님에게 ‘나남’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조지훈전집〉을 찾았다. 서너 달 후 출간한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를 집필 중이었던 모양이다. 의외이긴 했지만 저술에 필요한 자료를 찾는지 싶어 보내드렸더니 〈동경대전〉, 〈용담유사〉 저서와 함께, 安岩堅踏各異路(안암의 바위를 굳게 디디며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同流一心今通情(같은 기가 흘러 한마음이 되매 이제 살아 있는 정을 통하네)라는 한시(漢詩) 한 수로 답례했다. 여기서 안암견답(安岩堅踏)은 고려대 동문이란 뜻이다.
30여 년 전 김중배 대기자 집에 걸린 도올 선배의 명필 붓글씨가 생각나서, 이 한시를 친필로 받고 싶다고 청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대학로에 있는 ‘통나무출판사’를 찾았다. 도올 선배는 붓을 들자마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혼신의 힘으로 예술작품을 빚는 거장의 아틀리에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쓰기를 마치고 ‘석지’(石芝)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다. 석(石)은 내 고향 장흥의 석대뜰(동학혁명군의 최후의 격전지)에서 따왔고, 지(芝)는 지훈 선생에게서 따왔다고 했다. 영광이었다. 내 사무실에 걸린 향기로운 묵향(墨香)은 이날의 우정의 정을 흠뻑 풍기고 있다.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도올 선배는 나의 삶의 어떤 궤적을 평가했는가를 생각하며 “같은 기가 흘러 한마음이 되매”(同流一心)라는 구절을 되뇌었다. 일심(一心)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마음의 모습이라는 불교의 진여(眞如)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도올 선배가 나를 동류(同流)라고 불러준 것은 영광이기는 했지만 그 의미는 쉽게 알 수 없었다.
도올 선배의 이 글귀가 “나는 어떤 성장과정을 거쳐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나를 모른다? 사람들이 각자 기억하는 나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모자이크한 어떤 총합이 나일 것이다. 나도 스스로 나에 대한 어떤 편린들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비평 방법처럼 ‘낯선 나’를 내가 그려보기 시작했다. 아예 〈세상 가장 큰 책〉이라는 제목을 걸고 원고 쓰기를 시작했다. 이 책 <숲에 산다>에 담았던 나의 성장에 대한 기억들도 모두 그곳에 옮겨 다시 정리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끄집어내 기록하는 일이 먼저였다. 이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한 아쉬움이 컸다. 이야기해 줄 주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돌아가셨음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동생들에게 묻기도 했지만 내 기억에 미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세상에 눈뜨려는 발버둥도 보았다. 본격적인 성숙을 위한 껍질벗기의 시작은 아무래도 1970년, 대학에 와서부터였다. 유별난 질풍노도의 시대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자발적 껍질벗기가 아니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덮치는 쓰나미에 살아남으려고 생존의 강을 건너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인내하며 도약을 꿈꾸는 젊은 패기의 ‘낯선 나’는 더욱 낯설어 보였다.
대학을 마치고부터는 ‘좋은 사람이 되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평범한 잠언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스스로 자제하고 남을 진실되게 배려하면서도 지성과 야성을 조화하는 초지(初志)를 관철하는 호시우행(虎視牛行)의 길을 헤쳐나가야 했다.
입지(立志)의 서른 살부터 40년간은 출판을 통해 좋은 사람을 찾아내 따르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성숙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압축성장이었을 것이다. 출판과정에서 나의 스승이 되었던 좋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밝혀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나의 성장매듭을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을 통해 밝혀 보려는 〈세상 가장 큰 책〉을 쓰면서도 선택적 기억이나 자기기만의 확증편향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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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게 무덥고 갑작스런 대상포진과 잘린 손가락으로 애면글면하면서도 한 해를 무사히 넘기게 해준 수호천사도 있었다. 초봄에 시작하여 6월에 출판한 김훈 작가의 산문집 〈허송세월〉의 빅히트였다. 25년 전 조금은 가난하고 정직할 때 작성했던 ‘김훈 문학선’ 출판계약서가 오랜 시간 동면하다가 이 책의 출판으로 ‘위대한 계약서’가 되어 부활했다.
이제는 대작가가 된 김훈 선배가 마음의 빚을 떠올린 깊은 도량에 감동하며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다시 배웠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고해성사 같은 사색의 울림과 떨림을 최초의 독자로 공감하며, 내공이 쌓인 김훈 문체로 그려낸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를 훔쳐보았다. 이 책은 20년 전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의 밀리언셀러의 설렘도 상기시키며, 10월 한강의 노벨문학상 발표 때까지 10만 가까운 독자들을 뒤흔들었다.

연말에는 〈나남정본 조지훈 시 전집〉을 완간했다. 〈조지훈전집〉(전 9권) 출판 30년과 ‘지훈상’을 제정하여 25년을 운영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어떤 소명의식이 앞섰지만, 어쩌면 비겁하게 살지 않으려는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고통의 축제였다. 반년 동안 다섯 권 시집 원본과 ‘지훈상’ 제정 때 발굴한 ‘지훈육필시집’을 일일이 대조하여 지훈 선생이 가장 나중에 발표한 또는 출판한 것을 기준으로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가 대표적 경우이다. 시 제목의 변화나 개작 등 이본은 각주를 달았고, 맞춤법 교정과 한글화 작업도 병행했다.
“온전하게, 새롭게, 친근하게” 책임편집을 맡은 이남호 교수와 신윤섭 나남 편집상무의 신세를 크게 졌다. 지훈 시의 우아한 환생으로 가슴 뿌듯함에 취한다.

이 책 앞부분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에는 백년 자작나무숲을 이룰 10만 그루 묘목을 심는 마음을 길게 썼다. 어떤 운명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3천 그루 넘는 반송을 15년 넘게 기르는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두 반송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5년 전 전원생활을 시작한 나이 50 주변의 방황과 반송 사랑, 그리고 수목원 탄생을 되짚어 보았다.
늙을수록 고귀해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나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처음의 입지를 이루는 일에 전념하며 가 보지 않은 길을 늠름하게 헤쳐 나가는 절대고독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야 한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이겨낸 뒤에 얻어질 초월과 해탈을 위해서라도 그러하다.
 
2025년 찬란한 봄에
<조지훈 시 전집>의 표현을 따라
저자(著者) 지지(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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