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반송 이야기 ― 비워야 더 크게 채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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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5-05-20 조회수 : 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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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 첫걸음 새천년을 맞아 2000년에 광릉수목원 죽엽산 자락에 쉼터를 가꾸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날 무렵 오택섭 선생 시골집을 출입하면서 동네 민원이라며 그 건너편의 5백 평 천수답을 떠넘겨 받았다. 10여 년 잊고 살다가 국유림 8백 평을 임대받고 포도밭 1천 3백 평을 사 달라는 동네 민원도 해결하다 보니 2천 6백 평의 큰 땅이 되었다. 개울 옆에는 성(城) 같은 축대를 쌓고, 출판사 연수원도 생각하며 70평 남짓의 집을 신축하고 정원 가꾸기와 나무 심기에 몰두했다. 강남 서초동에 살면서도 농지원부가 있는 명실상부한 농부가 되고 농협 조합원이 되었다. 나이 50에 시작한, 꿈꾸던 전원생활의 첫걸음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잡스러운 도시생활의 욕망을 비껴난 새 희망의 안식처를 만들고자 하는 뜻이 더 컸을 것이다. 출판사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여 20년을 버텨내며 이름을 얻기 시작하고, 서울 서초동에 사옥 ‘지훈빌딩’을 짓고, 파주에 큰 농협창고 서너 개 크기의 물류창고까지 마련하고 한숨 돌리던 무렵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민주화 세력의 큰 축이었던 학생운동의 친구들도 정치권력 주변으로 눈에 띄게 진출했다. 손에 잡힐 듯한 크고 작은 유혹들에 솔깃하기도 했다. 스쳐가는 작은 욕망들을 다스리며 본업인 출판사업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서라도 이 산골을 나의 넬라판타지아로 의미를 부여하며 말 못 하는 나무들에게만 정성을 기울이는 데 아까운 시간을 쓰기로 했다.
자식같이 8년을 키웠던 서초동 지훈빌딩 앞의 30년 장송 세 그루와 앵두나무도 이곳으로 옮겼다. 아스팔트의 공해에 시달리던 이들을 해방시켜 자연의 숲으로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아들과 딸의 성장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앞뜰과 뒤뜰에는 30년생, 40년생 반송 두 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에 내가 처음으로 거액을 내놓는 호기도 부렸다. 동네 양조장 주인에게 넘어갈 뻔한 나무를 애써 확보했기에 더욱 정이 들었다. 자식들의 성장 모습만큼이나 그 푸르름과 하늘로 손짓하는 수형(樹形)이 너무 아름다웠다.
서초동 지훈빌딩에서 이사온 광릉집 소나무들. 뜰 전체를 아우르는 수호목이 되었다.
산기슭의 물이 많은 밭에는 배수로를 열심히 내기도 하다가 아예 큰 연못을 만들어 물길을 잡았다. 시간 나는 대로 공부 삼아 묘목들을 가꾸었다. 매실나무, 밤나무, 주목, 산수유, 소나무들이 그들이다. 이곳은 나무 가꾸는 실습장이자 자연을 보듬는 몸부림이었다. 바람과 비와 햇볕으로 생명력을 얻는 현장이었고, 계절이 바뀌면 새로 태어나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연습을 했다. 텃밭은 아내의 몫이었다. 지렁이를 뱀인 줄 알고 기겁하던 도회지 여인이 생명의 푸르름을 체득하고 손으로 배추벌레를 잡아내기까지는 두세 해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는 과일주 담그는 것은 일도 아닌 일상이 되었고, 감자나 고구마 농사보다 토란을 잘 키워 주변에 나눠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다.
2천 평 빈 공간에 독학으로 각종 묘목을 키워 보았다. 먹물 티가 밴 허영으로 나무키우기 교육을 받을 기회를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나무 심는 일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갖는 소규모의 패배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수준들에 실망했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작은 성공을 부풀리거나 되지도 않게 나무로 돈 벌 방법만 외쳐댔다. 홀로 서기를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기로 했다. 가뭄엔 빨갛게 타들어가는 묘목이 눈에 아른거려 별난 이권이 있는 회의라도 걷어차고 이곳에 물을 주기 위해 뛰어 오기도 했다. 평생 출판만 할 것이냐고 화려한 무도회의 참여를 권유하던 친구들도 차츰차츰 ‘나무에 미친 놈’이라며 나의 알리바이를 인정하는 듯했다. 죽은 나무 자리에는 흙을 북돋워 그 위에 또 나무 심기를 몇 년을 되풀이했다. 처음에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이 나무들을 통해 생명의 애착에 깊숙이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랑이 너무 깊으면 일이 난다는 그 선을 넘을 일이 아니었다. 이젠 나무 심는 마음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남은 생을 나무와 숲에 살아야 하는 업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한 이삼 년 남동원 선생을 모시고 열심히 〈주역〉 공부를 하면서도 얼핏 세상이치를 알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스치길래 ‘주역은 주역일 뿐’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며 공부를 접은 것은 잘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나무 심기에 이렇게 빠져들어 고생을 자처하는 끝없는 어리석음이 나의 한계임은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10년도 되지 않아 나는 장차 20만 평 ‘나남수목원’의 탄생을 옹골차게 기획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추가로 구입한 밭 세 마지기에는 밤나무 40그루가 해마다 알토란 같은 밤톨을 토해내고, 임대한 국유지 네 마지기 밭에는 매실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산수유, 헛개나무, 자두나무, 아로니아, 블루베리들이 어울려 크고 있다. 이제는 이 집이 본가(本家)가 되었다.
조경은 주변과 어우러져야 한다 포도밭을 밀어낸 도톰한 자리여서인지 집 주변이 맨살을 드러낸 듯 휑해 보여 꿈꾸었던 ‘숲속의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돌이든 억겁 년을 묻혀 있다 보면 현자(賢者)의 돌인 금(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한대의 시간을 극복해서 사람의 일생인 지금 여기에 앞당겨 실현하려 했던 연금술사의 망령 같은 욕심이 떠돌기 때문이다.
조경에는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했으나 내가 보기에 뭔가 불편하다 싶으면 견디기 어려웠다. 그 불편을 설명할 수도 없고 더욱이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어 더욱 그러했다. 우선 개울가에 큰 돌로 석축을 높이 쌓아 이웃들이 ‘오사카성’이라는 별명도 붙인 축대 가장자리를 삥 둘러 제법 큰 10년생 메타세쿼이아 다섯 그루를 심었다. 내가 선택한 수종이 아니고 인부들이 석축을 쌓으면서 임의로 조경수로 심은 것이다. 전남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떠올리며, 속성수(速成樹)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 나무들이 자라 곧 이웃들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우리 집을 숲속의 집으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옮겨 심은 나무가 제자리를 잡는 데는 사오 년이 쉽게 걸린다거나, 뿌리가 자리를 잡으면 탄력을 받아 상상 이상으로 크게 자란다는 사실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생각이었음은 그 이후에 벌어진 시행착오가 증명한다. 숲속의 집을 꿈꾸는 조급한 마음에서인지 뻥 뚫린 메타세쿼이아 사이의 빈 공간이 눈에 거슬렸다. 마침 제주도에서 보았던 해송(海松) 100그루를 구할 기회가 닿아 석축 가장자리 두 번째 줄에 촘촘히 심었다. 5년생이었지만 제법 녹색 띠를 두른 듯 집이 안온해 보였다. 봄마다 소나무와는 달리 봉긋이 솟는 해송의 새순이 보여주는 특이한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다음 해에는 해송 사이사이에 산수유나무 열 그루를 심어, 봄에는 가지마다 노란 왕관을 쓴 꽃들이 열병식을 벌였고 가을에는 빠알간 열매를 맺어 한겨울까지 가는 장관을 연출했다. 나무들이 커갈수록 집은 ‘숲속의 집’이 되어 아늑해졌다. 이런 작은 평화가 10여 년을 지속하자 이제는 집이 나무에 치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광릉숲 옆의 마명리 우리 집.
마침 그 무렵 시작한 포천 나남수목원 넓은 터에 이 해송 90그루를 옮겨 심었다. 10년 동안 훌쩍 커 장송 티가 나는 해송들을 이식하느라 공력이 많이 들었다. 그들이 내준 집 앞의 새로운 공간으로 숨통이 틔였다. 넓은 수목원으로 이식한 해송들은 낯을 가리는지 겸손한 모습이 되고 다시 키가 작아 보였으나 또 10년이 지나자 이제는 늠름하게 자리를 잡고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자리를 잡고 나서는 하늘로 치솟는 속성수가 맞았다. 한겨울에는 나목(裸木)이 되어 좌우대칭의 줄기들이 얼어붙은 파란 하늘의 캔버스에 그려내는 아름다운 수형을 몇 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겨울에 푸르름을 지키는 소나무, 잣나무의 기품만 알다가 낙엽 지는 활엽수가 보여주는 허공의 매력을 이때 알기도 했다. 메타세쿼이아는 처음에는 같은 키였던 산수유를 어느새 두세 배로 압도하며 20년 만에 20미터 넘게 성장했다. 이 그늘에 묻힌 산수유는 차츰차츰 햇볕에 굶주려 꽃도 많이 피우지 못했고 당연히 빨간 열매도 적게 열리며 잎들만 무성해졌다. 집 안은 울창한 산기슭의 물이 많은 곳이기도 했지만 나무그늘이 점점 짙어지자 항상 습기가 맴돌았다. 전망을 보자는 뜻도 있었지만 집 안팎의 습기 제거를 위해서도 산수유를 모두 베어내야 했다. 같은 때 수간거리를 생각해서 띄엄띄엄 심은 뒤뜰의 산수유는 제법 거목의 풍채가 보이는데, 가까운 미래도 예측하지 못하고 ‘숲속의 집’이라는 주술에 빠진 내가 이곳에 촘촘하게 심은 산수유는 그 생을 다하고 꽃잠에 들게 했다. 안타깝고 아쉬웠다.
사람의 통찰력이 대단할 것 같지만 눈앞에 직접 보이는 것 바로 뒷모습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짐작만 할 뿐 전혀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베어낸 산수유에 가려졌던 메타세쿼이아의 우람한 몸통이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크게 자란 수형에만 눈이 익숙했지 이런 굵은 뿌리에서 솟구친 한아름이 넘는 몸통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의 미시간대학 유학시절인 2010년 여행 중에 샌프란시스코의 뮤어우즈(Muir Woods) 국립공원에서 보았던 원시림 속의 두 사람이나 드나드는 거목의 환영이 스쳐갔다.
나의 첫사랑, 반송 2000년 처음 집 안 조경을 하면서 동네 조경업자가 20년 넘게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다던 반송을 탐내기 시작했다. 아들나무, 딸나무로 삼고 싶던 나의 반송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무 생장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한 아마추어의 맹목적인 사랑의 과정이 상처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음을 아는 데는 또 20여 년이 흘러야 했다. 나무사랑만 그러했겠는가? 50 주변이었던 그때부터 20년 넘게 내 삶이 세상과 교감하는 것도 서투른 실수투성이였다. 허망한 욕망의 주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나만은 하늘의 그물망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만에 취해 있을 때였을 것이다. 하기는 마침 어렵게 출판한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전 21권)가 밀리언셀러로 용틀임하려는 기운이 뻗쳐, 가난한 사회과학출판사가 20년 고난의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을 무렵이기도 했다. 이후 〈토지〉는 두 차례의 밀리언셀러 정상을 훌쩍 넘겨 나남수목원 조성에 큰 힘이 된 선량한 자본이 되기도 했다. 몇 달을 밀고 당기다 조경업자가 선심 쓰듯 넘겨준 반송 한 그루 몸값으로 당시 밭 30평 값인 거금 500만 원을 기꺼이 바쳤다. 아마추어가 치른 수업료로 여기며 나중에 ‘크게 바가지를 썼다’는 말에는 쉬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이렇게 잘 생기고 큰 반송의 몸값은 함부로 매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 반송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생명의 초록빛 향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렵게 안은 내 첫사랑을 시샘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가슴 벅찬 시간들이 흘렀다.
푸르른 성채처럼 웅장했던 반송.
집 앞뒤에서 반송 두 그루는 우아한 수세를 뽐내며 우리 집의 자랑스러운 상징목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초등학생이던 남매도 대학생이 되었다. 봄날 일정한 크기로 봉긋하게 솟아나는 수많은 새순들의 열병식은 생명의 환희를 매년 나에게 선물했다.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히어리, 산수유, 매화, 철쭉꽃들의 군무(群舞)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반송은 여러 가지의 끝부분에 촘촘하게 난 솔잎들의 집합이 초가지붕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해가 갈수록 앙증맞은 초록 우산의 이 반송이 대붕(大鵬) 날개 같은 하늘우산을 펼치며 내 곁을 지켜 줄 모습을 그리는 유쾌한 상상을 하는 나날이었다. 죽은 가지를 털어내고 웃자라는 싹을 매년 다듬어 주며 푸르른 성채(城砦) 같은 웅장한 모습만 즐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나며 서른을 넘긴 굵은 황장목 줄기가 받쳐주는 진녹색 초가지붕이 넓게 펼쳐진 것 같은 환상의 자태에 나의 자부심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이 반송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나남수목원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반송 조경수 단지를 꿈꾸며 12년생 반송 3,300그루를 가꾸기 시작했다. 반송 사랑에 빠져 봄마다 순을 치고 가지를 다듬으며 15여 년 후에는 우리 집의 반송처럼 자랄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힘든지도 몰랐다. 한 그루 한 그루씩 만져주며 말을 붙이다 보면 어느새 또 한 해가 훌쩍 지나갔다. 때로 위기는 축복의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고 했다. 나에게는 이 반송의 축복이 그러했다.
폭우로 부러진 반송의 첫사랑 2018년 유난히 긴 장마가 덮쳤다. 어느날 우리 집 뒤뜰의 50년이 다 된 아름다운 수형의 반송이 폭우 뒤의 물먹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허벅지만 한 맨 아래 큰 줄기가 찢겼다. 내 팔이 우지끈 꺾이듯 가슴이 철렁했다. 폭설로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소나무 줄기가 내려앉는 것은 보았지만, 물의 하중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처음 겪었다. 여러 줄기에서 많은 가지를 쳐 나간 촘촘한 솔잎들이 물을 머금으면서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근간(根幹)이 받치는 힘의 범위를 벗어난 허장성세(虛張聲勢)의 결과일 수 있다.
이 반송은 처음 갖는 자랑스런 나의 우주목(宇宙木)이었다. 반송과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분에 넘치는 좋은 나무를 키운다는 아내의 시샘을 외면하며 더한 애정을 쏟았다. 처음 몸살을 앓을 때는 나도 맞아 본 적이 없는 영양주사를 두세 해 동안 놓아주기도 했다. 존재 자체로 상징이 되었다. 광릉숲 옆에 마련한 집 뜰 전체를 아우르는 수호목이었다. 귀티 나는 겉모습에 빠져 작은 가지 하나 함부로 자르지 못한 과잉보호였는지 모른다. 자랄수록 안으로 깊어 가는 무게중심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팔을 스스로 부러뜨리지 않을 수 없는 나무의 성장통(成長痛)을 알아채지 못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한계를 넘어설 때는 근본이 부러질 수도 있는 자연의 섭리가 그것이다. 이상기후로 삼사 년 태풍도 없었는데 시간이 쌓이면 나무에게 이런 일도 일어났다.
큰 가지가 부러진 반송은 민망한 모습으로 나를 덮쳤다. 아름다운 좌우대칭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한쪽 아래가 뻥 뚫렸다. 생명에 대한 경외만이 아니라 그간 쏟아부은 사랑이 일시에 무너지는 먹먹함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서툴고 풋내나는 첫사랑이더라도 너무 겉모습에만 취한 채 무엇이 이를 견뎌내게 하는지를 전혀 모른 나의 무지한 반송 사랑이었음을 한탄해야 했다. 자랄수록 반경이 넓어지는 반송의 윗부분이 한겨울 폭설에는 눈의 무게를 견디는 모습이 안타까워 일일이 걷어내기도 했지만, 한여름 비에 젖은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지에서 솟는 솔잎들의 무게를 견뎌낼 만큼 큰 줄기가 튼튼해질 때까지는 하늘이 보일 수 있도록 잔가지를 일일이 쳐내 바람길과 햇볕길을 만들면서 하중을 줄여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었다. 그저 줄기에 잔가지가 하나둘 늘어 녹색 초가지붕 수형이 넓어지고 풍성해질 때마다 기뻐하며 애지중지했다. 지구 중력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고사하고, 작은 머리에 감당 못 할 큰 감투를 쓴 허영을 실체로 알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사랑스런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 한참을 고심했다. 그동안 나무 키우기에 선무당 같은 얼치기들을 많이 겪으며 실망만 했던 터라 누구에게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생태계의 당연한 비밀도 어렴풋이 눈치챈 마당에 평생을 같이할,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이 땅에 살아남을 이 녀석의 미래를 내 나름의 감각으로 감당하기로 했다. 반송 사랑도 벌써 20년에 가깝지 않은가. 아마추어를 벗어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길로 홀로 서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내 몫이기도 했다. 가끔은 치열한 독학의 아마추어가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문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신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찢긴 줄기를 몸통 가까이에서 베어냈다. 생명의 울음도 있었을 것이다. 좌우균형을 맞추려고 잘 자라고 있는 다른 굵은 줄기들도 베어내는 만용을 부렸다. 소나무는 가지 하나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소나무 수형을 갖는다. 사랑스러운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 셈이다. 눈에 익었던 수형은 온데간데없다. 반송 특유의 균형감을 찾기 위해 가지를 다듬고 찢긴 가지의 죄 없는 반대편 굵은 가지까지 베어내자 낯선 생뚱맞은 반송이 되었다. 단정했던 아름다운 긴 생머리 소녀가 강제로 삭발당한 선머슴아이처럼 나타났다. 입영 전야에 머리를 깎은 거울에 비친 청년 모습처럼 어설프기도 했다. 삼사 년 부지런히 솔밥이 채워지면 또 다른 모습을 선물할 것이라 자위하며 견디는 시간일 뿐이었다. 초록우산이 벗겨진 쉰 살 몸통의 근육질이 더욱 강건하게 용틀임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또 다른 덤일 것이다.
폭우에 가지가 내려앉은 반송 줄기를 몸통 가까이에서 베어 냈다. 언제쯤 솔밥을 채워 새로운 수형을 선물할까.
반송이라는 소나무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키우지 않고 둥그런 부채모양으로 가꾸기 위해 어릴 때부터 줄기와 가지를 다듬는 손길이 많이 가야 한다. 뒷동산의 다박솔처럼 줄기가 땅을 덮으며 그냥 자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어떤 욕망으로 이 수형을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명은 ‘일본적송(赤松)’이라 한다. 일본 정원수에 많이 보이고 그들의 일상이 된 소나무 분재(盆栽)의 소재로 쓰인다. 그러나 굵은 철사로 줄기를 얼기설기 얽어매 성장을 억제하며 작게 키우는 욕망의 잔인성이 싫다. 이것을 분재의 예술이라고 감상하는 사람들의 심사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피해를 보지 않은 앞뜰의 반송도 꿈꾸던 단정한 녹색우산의 수형 대신 건강하게 키우는 일이 우선이다 싶었다. 지나칠 정도의 전지작업으로 입대한 청년의 듬성듬성 쥐 파먹듯 깎은 머리처럼 어색한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광릉집 앞뜰의 반송
반송과의 어설픈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회한과 어떤 그리움과 속죄의 마음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 삼사 년을 지켜보며 부지런히 순치기를 하고 가지를 다듬어 새로운 얼굴의 반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반송은 스스로 자연치유의 생명력으로 새롭게 가지를 내어 빈 공간을 채우며 건강한 청년이 활짝 어깨를 편 전혀 새로운 역동적인 수형으로 성장했다. 아무도 손잡고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때의 큰 경험을 스스로의 지혜로 승화시켜 매년 수목원 반송들의 순치기와 가지치기로 바람길 햇볕길 내기에 더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었음은 생명에 대한 애착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반송과 함께한 시간이 10년을 훌쩍 넘는다. 그리고 이러한 몸부림은 어느 나무 밑에 묻힐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는 업(業)으로 체화되어 갈 것이다. 가꾸기가 그렇게 힘든 반송을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어야 한다. 이미 어떤 선택의 출구도 없는 내 운명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남수목원의 반송 가지치기
두 반송, 수목원으로 이사하다 3년 전에는 집 앞뒤에 정성을 다해 키우던 거대한 반송 두 그루를 드넓은 나남수목원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치렀다. 의젓한 대장부가 되어 더 많은 햇볕이 필요한 반송 주변에는 숲 향기를 더 맡을 욕심으로 심었던 계수나무가 상상 이상으로 우거졌고, 성장 탄력을 받은 느티나무는 아예 마을 정자나무의 위상으로 반송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더 넓은 확 트인 공간으로 옮겨 달라는 반송들이 침묵의 아우성으로 애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 집의 진입로 주변도 20년이 지나자 여기저기 건물이 들어서면서 갈수록 이 큰 반송이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걱정도 커져 갔다.
두 반송이 이사할 터를 마련하기 위해 수목원 인수전 앞의 잔디밭을 꼽았다. 이제는 자기 집처럼 의젓하게 자리 잡은 10년 전 한탄강 댐 공사로 수몰되기 직전에 구출해낸 우람하기 그지없는 느티나무 세 그루와 은행나무 한 그루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 했다. 거목이 된 이들을 수목원 곳곳 그늘이 필요한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두 반송을 앉히는 대역사에 여러 날 보람찬 땀을 흘려야 했다. 두세 차 분량의 흙을 돋운 봉긋한 기반에 영생을 살라고 안착시킨 두 반송은 다음 한 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을 치는지 솔방울을 잔뜩 맺으며 몸살을 하더니만, 또 새봄을 맞아서는 이내 기운을 되찾아 새순을 터트리며 웅자(雄姿)를 드러냈다. 이제 새로운 땅의 지신(地神)밟기를 끝낸 듯했다. 넓은 땅에서 3,300그루의 반송들을 뒤에 거느리고 용틀임하듯 활짝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자세가 이를 데 없이 늠름하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대붕(大鵬) 이야기가 스치기도 한다. 그의 초인적 지혜와 안목과 기백을 어찌 세속의 작은 날짐승들 같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수목원에서 가장 고요한 인수전(仁壽殿) 마루에 편하게 걸터앉아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행복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짧을 것인가. 나의 반송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이 반송 밑에 묻혀 몇백 년이라도 그들과 맘껏 뛰노는 축제의 나날을 함께할 것 같다.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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