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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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5-05-13 조회수 : 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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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의 흰색 껍질은 모든 빛을 반사하고 얻은 자연의 섭리다. 모든 빛을 받아들이면 까만 몸통의 괴목(槐木)이 되고, 엽록소는 초록색만 반사하여 우리에게 초록색 잎이 된다. 한겨울의 이 설백(雪白)의 수피에 반했다. 대학 졸업 무렵에 본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 덮인 웅장한 자작나무숲의 대향연은 50년이 지나서까지도 새록새록 떠올라 눈에 선하다. 그때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거듭된 패배 끝에 로마노프 황실이 붕괴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운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이 이어지는 대격변의 시기였다.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와 여주인공 라라의 애틋한 사랑이 자작나무숲과 함께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혹한으로 얼어붙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숲을 신기루처럼 바라보며 자유를 갈구하던 모습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자작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를 말하면 공감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 싶다.
내 삶의 변곡점이 되었던 영화가 또 있다. 그 몇 해 전에는 영화 〈빠삐용〉에서 생존을 위해 끝없는 탈출을 감행하는 무기수(無期囚)의 도전에 애정을 보내며 동참하기도 했다. 수차례 재방되는 영화를 챙겨보다가 문득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여섯 번인가를 실패하고도 치열한 탈옥을 포기하지 않던 그가 다시 잡혀 생사를 넘나드는 감옥에서 되뇌는 혼잣말이 귀에 박혔다. “나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다. 내 인생을 낭비한 죄가 그것이다.” 낭비했던 인생을 다시 살고자 갈망한 그의 마지막 탈옥은 성공해야 했다. 나도 그 무렵 빠삐용처럼 시시때때로 절해고도의 밀림 속 감옥 같은 현실의 그물망에서 몇 번이나 목숨을 건 탈출을 기도하며 몸부림쳤을 것이다. 스스로 한 차례씩 껍질벗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껍질을 벗어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가위눌림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의 독백이 내 삶의 등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낭비한 것 같은 지난날의 어느 부분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어떤 조바심 때문일 것이다. 한 겹씩 껍질을 벗어내는 제의(祭儀)는 계속되어야 했다. 어쩌면 계산될 수 없는 생태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나무 심는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 이어지는 자작나무와의 인연도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었지 싶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자작나무숲 속의 집
마침 21세기가 시작되기 10년 전 한밤중에 내린 폭설처럼 다가온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현장을 찾아보는 기회에 동유럽을 처음 구경하며 나의 반쪽짜리 세계인식의 허전함을 달랬다. 제3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그네에게는 제1세계의 크레디트 카드도 무용지물이며,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의 혼융과 함께 제2세계의 붉은 깃발도 낯설었다. 이 세기의 격동으로 잇달아 소련(소비에트연합)이 해체되면서 철(鐵)의 장막이 열리며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1993년 톨스토이 생가를 방문하는 여행단에 끼어 러시아 땅을 밟았다. 수도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개혁 개방의 소용돌이 속에 빵을 사려는 허기진 행렬이 곳곳에 긴 줄을 이루었다. 청소년기에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방문도 감격할 만했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러시아 자작나무숲이 맴돌았다. 일부러 찾아간 모스크바 근교의 작가촌 페레델카노에는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기념관이 한여름 울창한 자작나무숲 가운데 있었다. 의자와 책상 등 실내장식 모두가 자작나무였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자작나무숲 향기의 절대고독이 그러한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켜 195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련 공산체제의 탄압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던 작가의 또 다른 고독도 어리는 듯했다. 그 절대고독이 30년 가까이 지금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곳을 다시 찾아보기 어려워서인지 상상 속의 향기가 더해지면서 체화(體化)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인을 일컬어 “화촉(樺燭)을 밝힌다”고 말하는 것도 첫날밤 등잔불을 이 자작(樺)나무를 잘게 깎아 태우는 불로 어둠을 밝혀 행복을 부르기 위한 주술적 샤머니즘이다. 목질에 기름기가 많아 자작나무로 만든 관은 방부(防腐)가 되어 잘 썩지 않아 최상품으로 대접한다. 황백색의 자작나무 속은 깨끗하고 균일해서 팔만대장경 목판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천연의 방부제 성분이 함유된 자작나무 껍질은 후세에 전할 부처님의 모습이나 불경을 적는 종이 구실을 했다.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1977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이 그것이다.
다시 10년 후 자작나무 원시림을 찾아 2013년 바이칼 호수 탐방 길을 나섰다. 설날 연휴를 택하여 영하 40도의 찬바람을 뚫고 떠오르는 새해 태양을 그곳에서 맞고 싶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로 쉽게 갔지만, 이르쿠츠크까지는 꼬박 3일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갇혀 지내야 했다. 단조로운 레일 위를 구르는 열차 진동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깰 때마다 차장 너머에서 연이어 덮쳐오는 자작나무숲의 파노라마에 압도되었다. 하얀 자작나무의 군무(群舞)가 백설의 설원에 현란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또 잠에 빠지면 나도 한 마리 백학(白鶴)이 되어 춤을 추었다. 비몽사몽의 꿈길 같은 여행길이었지만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는 몽골의 기병(騎兵)처럼 6시간의 눈바람을 헤치고 버스가 달렸다. 영하 40도의 혹한에는 눈도 습기를 품지 못하고 가볍게 휘날리는 눈이 되어 미끄럽지는 않았다. 이곳도 사람이 살게 마련인 모양이다. 가끔씩 버스를 세워 설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작나무를 안아본다. 나무의 온기를 느껴보기 전에 무릎 넘게 눈에 빠진 발이 시리다. 가슴을 열어주지 않는 자작나무가 나를 민망하게 한다. 바다 같은 바이칼 호수의 맑은 물은 두꺼운 얼음에 갇혀 있다. 호수를 둘러싼 아스라한 하얀 눈 위에 우뚝 선 자작나무숲은 때 묻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태고(太古)의 음향만 가득한 원시의 존재 자체였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6시간의 버스 여행길에 만난 눈 속의 자작나무숲.
2018년 봄날, 어린 자작나무들을 처음 만났다. 꿈꾸는 수목원의 탄생을 위해 첫 삽을 뜬 지 10년 만이었다. 포천시 산림과를 정년퇴직한 박찬억 과장, 이상근 과장이 수종개량사업의 참여를 권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10여 년은 함께 부딪히며 살아 보아야 곁을 조금은 내주는 모양이다. 3천 그루가 넘는 반송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자작나무에 눈을 뜨게 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산주 부담은 10%뿐이며 나머지는 시와 도에서 지원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전관예우도 있었겠지만 열심히 권하는 그들과의 작은 우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프로젝트를 덥썩 받았다. 언젠가는 만나야 할 자작나무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은 미미했지만 7년이 지난 지금 내가 자작나무 10만 그루를 가꾸는 늦바람의 광풍에 빠지게 될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2018년 식목일 주변에 1년생 자작나무 묘목 9천 그루를 심었다. 반송 밭 언덕 너머 1만 평의 참나무류의 활엽수를 베어낸 자리다. 군데군데 50년 넘게 자랐을 나무의 그루터기가 눈에 밟힐 때에는 이런 시구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먼저 자작나무숲을 위해 자리를 내준 나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루터기는 새로운 자작나무 묘목들에게 자리만 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늘도 내준 것이기도 하다. 그루터기가 썩어 자취도 없을 무렵이면 그 자리에 자작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아 거목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 시간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손주들이 인내해야 할 그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잡목숲을 베어내자, 건너편 산등성이가 보일 만큼 시야가 확 트이고 베어낸 나무들의 키만큼 20여 미터가 낮아진 산이 포근하게 안긴다. 어린 묘목이 눈비 맞으며 성장하면 10여 년 뒤에는 늠름한 자작나무숲처럼 3천 그루 넘는 반송나무 뒤로 병풍을 두를 것이다. 지금 수목원에 자리 잡아 요염한 자태를 보이는 자작나무는 20년 전 파주 적성에서 처음 키웠던 묘목 5백 그루 중 1할도 되지 않는 생존자들이다. 기품 있고 정갈한 ‘숲의 귀부인’, ‘숲의 정령(精靈)’으로도 불리는 자작나무는 성격이 까탈스러운지 큰 나무를 이식하여 키우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터를 잡아 큰 나무로 영생할 수 있도록 3미터 간격으로 어린 묘목을 심으며 7할 정도의 생존율을 욕심내 본다. 인큐베이터인 묘목밭에서 겨우 한 해도 자라지 않은 채, 처음으로 거친 산야에 나온 두세 뼘 크기의 고사리 같은 저들이 어떻게 견뎌낼지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처음은 미미하나 결과는 창대하리라는 말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마음 한편에는 막스 베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내 생전에 자작나무숲 비슷한 장관을 볼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배반의 끈도 놓지 않았다.
나이 일흔에 이제 대규모로 묘목을 심는 마음은 늦게 철든 치열한 욕망을 승화시키려는 또 하나의 발버둥이다. 내 삶의 시간을 넘어서는 나무 심는 마음의 시간을 더욱 길게 잡아야 한다는 공리(公理)를 익히는 데 또 10년을 보낸 셈이다. 지금 심는 묘목들이 한 40년 후에 숲을 이루는 풍경은 손주 녀석들이 같이하면 된다. 그때 어느 나무 밑에 묻혔을 우직한 할아버지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여 이 녹색공간을 후대에 계승시켜 주면 더욱 기쁠 것이다. 나무는 큰 나무를 욕심내지 말고 오랫동안 묘목을 심어 키우는 것이라고 몇 년 전부터 신신당부했던 구순이 넘은 예춘호(芮春浩) 선생의 말씀을 이제야 가슴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겨울숲의 자작나무는 홀로 살아 있다.
두 해가 지나자 처음 심은 한 자쯤의 1년생 자작나무 묘목 9천 그루가 허리춤 넘게 자랐다. 풀들을 이겨내며 새로운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존재감을 자작나무 특유의 하얀 표피로 드러낼 것처럼 웅변하고 있다. 직접 키워보고서야 혹한의 러시아 광야에서 보았던 자작나무가 이렇게 빨리 자라는 속성수였는지를 처음 알았다. 풀을 베어주고 거름을 한 번 줬을 뿐인데 이처럼 자란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수종갱신 사업을 지원했던 시청 산림과 담당자도 성공적인 자작나무 묘목의 활착을 보고 처음 겪는 일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우리 수목원 토양이 우연히 이 나무와 잘 맞았는지 최근의 이상기후의 어떤 영향인지는 모를 일이다. 군데군데 묘목이 죽어간 자리에는 2천 그루를 보식했다.
은근히 자작나무숲 조성에 대한 욕심을 억누르질 못하는 나를 보았다. 손으로 거름을 주면서 머릿속으로는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의 5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스친 것이다. 내친김에 2차 사업으로 자작나무 밭에 연이어진 참나무류의 잡목밭을 더 밀어내고 2년생 묘목 6천 그루를 심었다. 이제 1만 5천 그루의 자작나무들이면 제법 숲을 꿈꿀 수도 있겠다 싶었다. 뒤늦게 자작나무 묘목을 심는 나를 걱정하는 주위의 시선도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어린 나무들의 새파란 새싹들이 춤추는 장관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 치솟을 수 있도록 줄기 아랫가지를 전지하고 칡이나 다래줄기를 걷어내며 또 한 해가 지나자 1차 사업의 9천 그루는 자작나무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어떤 녀석들은 벌써 하얀 목피를 드러내며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10여 년간 3,300그루 반송을 애지중지하며 몸부림치던 내가 이제 자작나무 사랑을 키워가면서 ‘시즌 2’의 수목원을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5년생 자작
언제부턴가 인수전(仁壽殿)에 오를 때면 반송 밭 반대편 골짜기 너머 참나무류들이 주종을 이룬 원시림 같은 잡목숲이 눈에 밟혔다. 저기 3만 평에도 자작나무를 심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목원 위에 텃밭이 있어 오며 가며 10여 년 정이 든 박남중 시청 산림과장이 정년을 앞두고 가끔 수목원에서 나에게 반송 전지작업을 배울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부탁했다. 저기까지는 내 생전에 자작나무숲을 이루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내 마음속의 3차 프로젝트였다. 내 후손들이 이곳에 자작나무숲을 언감생심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며 혹여 생각한다 해도 실천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밀어붙이기로 했다. 3년 전에 내 나이 칠순을 기념하여 처음 심은 1만 5천 그루의 자작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그린 그림이었다. 박 과장이 4만 5천 그루의 자작나무들이 표주박 모양으로 반송 밭을 감싸는 환상의 그림을 만드는 꿈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또 두 해가 지나 봄날의 가녀린 햇살이 겨울의 두툼한 외투를 벗겨내면, 아직 녹지 않은 북향쪽 사면의 잔설에 발이 빠져가며, 3차로 심었던 자작나무의 잔가지 치기를 시작했다. 한 자도 되지 못한 어린 묘목들이 야생에 뿌리를 내려 내 허리춤까지 자라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뽐내었다. 자작나무 주변으로는 둥그렇게 눈이 녹아 있다. 나무 몸통으로도 숨을 쉬는지 산소를 내뱉는 뜨거운 입김에 녹아 든 모양이다. 아니면 봄을 준비하려고 가지의 끝까지 땅속의 물을 세차게 빨아올리느라 생긴 열기로 눈이 녹았는지도 모른다. 새봄에는 나무의 몸통을 만져 볼 일이다. 평소에는 알 수 없는 이 따스한 온기를 찾아서.
2024년이 시작되면서 마지막 큰일을 저질렀다. 이미 전년 말부터 시작된 자작나무숲 프로젝트의 거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여러 해 전부터 재선충이 남쪽부터 전국적으로 번지자 감염된 잣나무를 처리했는데 고사목만을 베어 훈증처리하고 나머지는 보존했다. 소나무에 재선충 예방주사를 놓기도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이 더욱 창궐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예산과 인력 동원에 지친 정부에서 모두베기를 하여 파쇄해 다른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침을 정한 모양이다. 북방계 재선충은 소나무보다 잣나무만 파고든다는 풍문에 마음속에서라도 반송 걱정을 덜기도 했다. 이렇게 재선충 창궐이라는 뜻하지 않은 사태로 자작나무 2만 그루를 새로 심었다.
2만 그루씩 이렇게 네 차례 자작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마치자 7만 평 땅에 심은 8만 그루의 자작나무를 수목원에 품게 되었다. 2년마다 이루어진 프로젝트라서 자작나무의 키가 차이가 나는 것은 삼사 년 지나면 극복할 수 있지만 중간중간에 보호수 장벽으로 남겨둔 잣나무 군락지가 눈에 거슬렸다. 저 2만 평의 맹점(盲點)들을 자작나무로 덮을 방법은 없을까를 궁리했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확 트인 자작나무의 수해(樹海)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3박 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차창을 스치는 러시아 자작나무숲의 환영(幻影)이라도 여기에 재현하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몇 년이 더 지나면 10만 그루의 자작나무숲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상상했던 것 이상의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소년의 작은 자작나무들이 모여 거목 이상의 웅장함을 선물한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10만 그루의 자작나무를 심겠다고 계획할 안목도 없었겠지만, 7년 동안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었기에 오늘의 자작나무숲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 삶도 항상 이렇게 옹골차게 나이테를 만들어 왔나 보다. 소설가 김훈의 관찰처럼 “자작나무 흰 수피의 안쪽에서 흰 색과 검은 색이 섞이면서 또 헤어지는 자리”의 자작나무의 귀여운 이파리들이 수해(樹海)를 이룰 것이다. 바람에 흔들릴 때는 일렁이는 파도가 치는 것 같고, 그 틈으로 부서지는 햇살들이 하얀 몸통에 반사될 때는 환상과 실제가 순서 없이 교차되는 장엄한 교향곡이 울려퍼질 것이다. 이 첩첩산중에 큰 바다를 옮겨 놓은 것 같은 수해가 바로 여기에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를 ‘하얗고 긴 종아리가 슬픈 여자’로 읽은 최창균 시인의 절창(絶唱) 〈자작나무 여자〉와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고 약속해야 한다. 자작나무숲 가는 길 옆에 이 시를 담은 입간판을 세웠다.
(20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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