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꾸는 나무들, 수목원의 탄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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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5-05-16 조회수 : 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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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양재역 앞 서초동에 지훈빌딩을 마련하여 출판사를 할 무렵 5층 계단에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책 출판의 답례로 누군가에게 받은 글씨였지 싶다. 그때까지도 세상과 편하지 않았던지 세상과 불화할 때마다 이 글귀가 위안이 되었다. 앞부분은 ‘卽時現金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이다. 강파른 세월에 생각만 앞섰지 보여줄 것도 없이 소인배(小人輩)들 틈에서 대인(大人)의 꿈이라도 펼쳐 보이려면 얼마나 냉혹하게 자신을 살피고 독려해야 하는지 몰랐다. 출판을 통해 들불처럼 타오르는 지성의 열풍지대를 창조하기 위해서라도 사무실 벽에 걸린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액자 “자강불식(自彊不息)”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보낸 세월은 스스로 언론출판의 뜻을 세우고 헤쳐나간 40년이 다 되는 장엄한 계절이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갈월리에 20만 평의 나남수목원을 꾸미는 것은 내가 지구별에서 가까운 미래에 소풍을 마치고 떠나면서 이곳에 왔던 흔적으로 사람들에게 녹색공간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그 수목원에 아름다운 책박물관을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40년 가까이 지성의 열풍지대에서 꿈과 땀으로 일구었던 일업일생의 책들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담아 둘 공간이었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동 우면산 산사태로 번화가 아파트가 흙에 묻힐 뻔했던 2011년 여름, 백 년 만의 태풍과 집중호우는 이곳 포천 나남수목원도 그냥 스쳐가지 않았다. 20만 평 수목원의 그랜드 디자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테마로 어떤 나무를 키울 것인가를 꿈꾸어 볼 기초상식도 있을 리 만무한 천둥벌거숭이에 지나지 않았을 때 이 천재(天災)를 당했다. 삽 한 자루를 들고 처음으로 한 2년 동안 가꾸었던 밤나무, 헛개나무, 구상나무 묘목, 복자기 단풍나무 등 3천 그루의 묘목밭이 산사태로 떠내려 갔다. 50년 넘는 거목의 잣나무, 참나무 백여 그루가 뿌리채 뽑혀나가고, 깊게 파인 골짜기는 악마의 이빨을 드러냈다. 휩쓸려 내려온 토사는 거액을 들여 이제 막 완공한 책박물관 앞 호수까지 흔적도 없이 덮쳤고, 작업로, 임도(林道)는 거의 끊기거나 묻혀버렸다. 재해현장은 KBS <9시 뉴스>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십 리 가까이 폐허가 된 산속의 거대한 침묵이 처음 겪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로 엄습했다. 여기서 자연의 위대함에 승복하고 그만둘 것인가 하는 암담한 생각에 두세 달 넘게 허우적거렸다. 그 길이 옳은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후 계속된 험난한 수해복구에 바친 골병 같은 노동의 시간이 그러하고, 아마추어의 무모한 도전이 생활습관과 삶의 가치관 등 남은 생 전체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 심는 마음이 생명에 대한 연민(憐憫)이라는 가장 정직한 대의명분으로 떨치고 일어나기로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예순을 갓 넘은 나이가 좋았고, 출판사 창립 20여 년 만에 찾아온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장안을 뒤흔드는 베스트셀러의 세례도 행운이었다.
수해복구 작업으로 새로운 땅이 생겨났다.
막막한 마음으로 복구작업에 나섰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제부터 나의 본능에 맡기기로 했다. 가끔은 아마추어가 전문가보다 더 큰 일을 이뤄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그 아마추어의 세련된 본능이기를 주문처럼 되뇌며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고독한 나의 길(吾道)을 걸어 등고산(登高山) 망사해(望四海) 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닮고 싶었다. 먼저 작업로를 복구했다. 길을 넓히고 석축을 쌓아 새로운 길을 뚫었다. 조그만 산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털어낸 흙으로 폭우로 파인 골짜기를 메웠다. 눈에 띄는 급한 곳만 손보는 데도 한두 해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대역사였다. 수해방지용 사방댐을 새로 건설하고 느티나무, 밤나무 묘목 각 300그루, 헛개나무 1천여 주를 새로 심으며 온 정성을 쏟은 장엄한 시간들이었다. 천진난만한 백면서생인 나의 일상도 거친 산(山)사람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이제까지의 속세의 관계망이 무너지고 나무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생태계의 삶을 사는 듯했다. 산사태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목원의 스카이라인이 바뀌었고 전혀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토목공사에 서울 강남 아파트 두세 채 값이 더 들었다.
수해복구를 대충 마치자 조그만 산봉우리를 깎아낸 곳과 골짜기를 메운 곳에 2만 평이 넘는 새로운 땅이 생겼다. 의도하지도 않았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결과였다. 그 땅의 출생비화가 그러했는지 차분한 계획이나 마음의 준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남 산청댐의 완공으로 열흘 후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는 13년생 반송 1천 5백 그루를 살려 달라는 급전이 왔다. 한두 해 전 15미터가 넘는 장송 1백 그루를 수목원에 납품한 조경업자였을 것이다. 세종시 이전 정책이 자주 바뀌어 조경목 납품이 뒤흔들려 손해를 많이 봤다는 그이를 안쓰럽게 생각해 위로하기도 했었다.
13년생 반송들이 무슨 군사작전처럼 천 리 길을 야간행군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인간의 간섭 없이 평생을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행운아들인 셈이다. 장관을 이룬 반송들이 주는 위압감은 뿌듯하기는 했다.
처음 반송 묘목 심을 무렵.
그동안 키운 어리숙한 농부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액면 그대로 덥썩 받아들인 아마추어의 고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고수였다. 아니 탐욕의 보통사람들을 나무 키우는 착한 사람으로 상정한 내가 아마추어였을 뿐이다. 반송 키우는 비법이라도 전수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나무를 팔고서는 소식도 없다. 세속의 때가 싫어 산으로 왔는데 사람들은 나를 계속 시험하는 모양이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송나무 공부를 새로 시작했으나 배울 곳이 없었다. 소득이 되는 여러 종류의 유실수나 약초 재배는 경험 있는 사람이 많았으나, 장기간 예측이 쉽지 않고 손이 많이 가는 고급 조경수인 반송의 경우는 누가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또 독학의 길을 가야 했다. 나는 왜 항상 외로운 것인가. 안갯속을 헤매는 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반송을 가장 사랑한다고 되뇌는 자기최면의 몸부림을 말 못 하는 이 녀석들이 알아채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반송 장사로 재미를 봤던 사람이 악어의 눈물 같은 반성을 했는지 내가 반송을 대규모로 제대로 키운다는 소문을 냈는지 강원도 원주, 고성 등지에서도 비슷한 또래의 반송이 이사 와서 3,300그루의 반송이 자라는 반송 대단지가 되었다. 두세 해는 몸살을 앓았으나 이제는 자신의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청년의 기개로 용틀임을 하고 있다. 매년 봄에 치솟는 새순을 다듬어주고 바람길 햇볕길을 만들어 주는 가지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이들은 그 푸르름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한다. 새순이 솟을 때는 연두색 천지의 반송 밭에서 장쾌한 열병식이 열리고, 송홧가루 날리는 윤사월에는 생명의 환희로 숲을 소란스럽게 하며 그 씨가 떨어져 생긴 아기 소나무도 여러 곳에 크고 있다. 한겨울의 혹한에도 푸르름을 뽐내는 연대 병력의 사열을 받는 나는 천군만마를 얻는 기쁨을 누린다.
예상을 뛰어넘어 성장한 반송들은 나의 희박했던 공간개념을 허물었다.
지난 2년은 이런 깨달음으로 수목원의 반송 손질에 눈코 뜰 새 없었다. 4년 만에 잔뿌리까지 잘 내려 성장에 탄력이 붙었는지 스무 살의 녀석들이 지난해부터는 내 키를 넘어 압도하기 시작했다. 자식 키우는 마음과 또 다른 가슴 뿌듯함뿐이었는데 이제는 20년 후의 비바람과 폭설을 견딜 녀석들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깨물어 어느 손가락이 아프지 않을 수 없겠지만 3천여 그루는 너무 많았다. 한여름에 시작하여 눈이 내리기 전까지 모두 만져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마음이 앞서고 손질은 버벅댔다. 다른 일정이 계획되었던 인부들까지 이 일에 투입하였다. 그들에게 내가 깨우친 20년 후의 반송 수형(樹形)을 미리 그려주는 그랜드 디자인의 유쾌한 상상을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네 차례 순차적으로 심었던 반송들이 그사이 이렇게 큰 것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5미터 수간(樹間)을 생각했지만, 맨 처음에 심은 반송은 공간개념이 희박한 내가 썰렁하다는 생각에서 아무래도 바투 심었던 것 같다. 몇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아마추어가 자초한 고역이었다. 꼭 부딪쳐 보아야 아는 것은 아니라도 나의 예측 가능한 미래의 수준이 그러했다. 햇볕을 많이 받는 남쪽 사면의 반송들이 더욱 그러했다. 서로 수형을 자랑하다 자리다툼할 것 같은 답답하게 보이는 1백 그루를 골라 다시 캐내 널찍하게 옮겨 심는 일부터 시작했다. 처음 심을 때보다 세 배 이상 자란 녀석들 때문에 몇 배의 품과 시간이 드는지 몰랐다. 서너 차례의 물 주기와 줄기와 가지를 다듬는 일로 한 달을 보냈다. 일본 동경의 수목원을 견학하고 마음에 두었던 수목원 사이사이의 작업로를 두 배로 확충하는 일도 병행하였다. 그 틈에 일동에서 촌노(村老)가 씨앗을 받아 30년 동안 정성 들여 키운 반송 80그루도 새 식구로 받아들여 인수전 뒤편 잔디밭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게 했다. 조금의 수정보완인데도 생명들에 관한 일이어선지 힘이 너무 들었다.
우선 지금까지 눈에 익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반송의 수형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 땅에 오래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는 그다음 문제다. 땅으로 쳐진 굵은 아랫줄기들을 과감히 베어내 바람길을 열었다. 땅에 뿌리박은 줄기 몇 개만 살리면서 약한 줄기와 곁가지 들을 쳐냈다. 삶이 그러하듯 지금은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곁가지의 운명이 눈에 보였다. 처음부터 햇볕 경쟁에서 뒤져 뒤틀린 약한 줄기는 자라더라도 결국 튼실하게 자란 줄기들 틈에 삭정이가 되어 햇볕 길을 막아 나무 전체가 몸살을 앓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일이나 나무 생태계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송 밭이 조금은 낯선 풍경이 되었지만, 신선함으로 변신할 두세 해 후의 봄날을 기다리며 참기로 했다. 넓어진 공간 1천여 평에는 오랫동안 고민하여 미루었던 잔디를 입혔다. 살아남은 반송들은 푸른 잔디밭 위에 갑자기 신사가 된 듯 기품을 뽐내고 있다. 사람도 실천하기 어려운 ‘비워야 더 채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지를 절단당하면서 많이 아팠을 나무들이 재창조할 그들의 찬란한 봄을 그려 본다.
수목원 탄생의 거친 숨결이 10년째로 접어들었을 무렵, 수목원을 시작하며 생각했던 3천여 그루의 반송(盤松)동산 앞에 3칸짜리 6평 정자도 5년 만에 지어 잠시 햇볕 피할 공간도 마련했다. 정자 이름을 직접 써 붙이고 싶었으나 몇 번이나 망설였다. 글귀가 마음에 들어 인사동에서 구입한 현판 ‘인수전’(仁壽殿)을 처마 밑에 걸었다. 이제부터라도 어질게 살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대들보 뒤편에는 웅장한 기개를 보인 한말 항일운동을 펼친 윤용구(尹用求) 선생의 ‘기장산하’(氣壯山河) 현판을 걸었다. 우연히 인사동에서 구입한 이 현판에도 놀라운 인연이 있다. 세상일을 주관하는 내가 모르는 어떤 힘이 따로 있지 싶다. 운용구 선생은 1920년 나의 12대 선조인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공(公)의 신도비(神道碑)의 글씨를 썼다. 산서공 할아버지는 전북 남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육전(陸戰) 기록인 <난중잡록> 3권을 저술하셨다.
인수전 앞에는 불을 밝혀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석등을 모셨다.
잠시 뒤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는지 벌써 생태계의 거대한 질서의 운항을 조금이라도 눈치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가끔씩 그때 알았더라면 이런 시행착오는 하지 않았을 거라는 열정만 앞선 아마추어가 갖는 푸념도 섞인다. 20년을 준비했다는 나무 심기의 내공도 책상물림의 교만이거나 허영일 수도 있다는 자책이다. 그러나 편견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무모함으로 가끔은 아마추어가 세상을 뒤흔드는 업적도 이룬다는 생각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자기최면을 공고히 하고, 고통을 축제로 여겨야 그만큼이라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에는 나무농사가 지겹다는 옆 동네 농부의 선의(善意)로 20년을 키운 은행나무 4백 그루를 건네받았다. 한 20년 넓은 수목원의 햇볕과 바람만 먹고도 거목으로 자라 노란 은행나무의 고즈넉한 낙엽길을 환상처럼 만들 것으로 상상한다. 아내가 바라는 기억 속의 숲길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마침 한탄강댐을 만들면서 물에 잠기는, 그 동네의 사당나무 역할을 했던 80년이 넘는 거목인 느티나무 일곱 그루를 어렵게 이식해야 했다. 수형이 너무 아름다워 생채기를 덜 내고 옮기느라 힘도 몇 곱절 더 들었지만, 영생할 생명을 내가 건져냈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문인석 30여 분이 맡는 가을의 향기는 무엇일까?
2015년 수목원의 봄은 산벚나무의 꽃그늘만이 아니라도 유별나게 포근하게 안기었다. 50년간 나무를 가꾸었던 수목원 근처의 문중 땅을 개발한다면서 내놓은, 3백 그루 넘는 450년 잘 자란 나무들이 두 달에 걸친 힘든 이식작업으로 우리 수목원의 새 식구가 되었다. 한 대로 곧게 자란 라일락, 선비목이라는 회화나무들, 다 자란 보리수, 귀한 오엽송들, 성목이 된 우람한 자귀나무와 귀룽나무들, 수형이 예쁜 측백나무와 향나무들, 그리고 오랜 시간 키워야 하는 눈주목 1백 그루와 회양목들, 장년이 된 느티나무와 단풍나무들이 그들이다. 가장 반가웠던 것은 가장 더디 자란다는 구상나무와 종비나무 10그루를 품에 안은 것이다.
나남수목원의 겨울. 폭설 뒷날의 고즈넉한 풍경이다.
2015년 늦가을 석인(石人) 20분이 수목원 식구가 되었다. 모두 2백 년이 넘는 문화재급인 문인석(文人石)들이다. 옛돌박물관을 설립한 천신일 회장님의 배려로 호숫가 돌담장 앞에 모셨다. 문인석은 묘소를 수호하는 석물로 앞쪽의 좌우에 배치된다. 공복(公服)을 입은 상태로 복두(頭)를 쓰고 홀(笏)을 들고 있다. 공복은 임금을 알현할 때나 동지, 설날 등 경사스럽고 즐거운 대사가 있을 때 착용하는 관복이다. 복두는 두 단으로 각이 진 관모로 사모의 전신이다. 홀은 신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으로 상아나 나무로 만들었다. 3칸 정자(仁壽殿) 옆에는 불을 밝힘으로서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邪)의 뜻으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石燈)에 버금가는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석등까지 모셨다. 공간을 지배하는 석등의 아우라는 훨씬 크게 다가온다. 잔디밭과 고졸(古拙)한 3칸 정자, 우람한 석등, 큰 나무들, 넓은 호수, 도열한 문인석들, 기다란 돌담장, 그리고 3천여 그루의 반송이 만들어내는 3만 평의 공간은 품위 있는 왕릉(王陵)의 풍경으로 비쳤다. 저 어느 나무 밑에 나무처럼 살다 영면하는 평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2016년에는 책박물관, 관리동 증축공사가 끝났다. 관리동에는 산사(山寺)의 요사채처럼 숙식을 하며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12평짜리 6칸의 고급 원룸을 더 지었다. 전체 526평이 되었다. 꼭 5년 만의 역사(役事)였다. 두 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 아파트 두세 채 값이 들었다. 그 돈이 어디서 충당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쏟아부은 열정만큼 나이도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는 완성해야겠다는 마음만 앞선 것 같다. 홍성천 교수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설계하고 시공을 감독했다. 설계사무소와 자원봉사하는 어린이 건축학교 일에도 바쁠 텐데 그이는 지금도 토요일이면 나와 함께 정성을 다해 수목원 나무를 가꾸는 붙박이가 되었다.
책박물관 내부. 강현두·김세원 교수 내외와 감동을 같이하고 있다.
2017년 5월에는 책박물관의 넓은 홀에서 개관식과 함께 17년째 이어오는 지훈상(芝薰賞) 수여식을 함께 했다.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어려운 고비마다 격려해 주신, 이제는 나들이가 쉽지 않은 팔순이 넘은 선배님들이 먼 길을 오셔 축하해 주며 오늘의 성취를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출판 멘토인 문예출판 전병석 사장, 30년 강남시대를 함께한 조남호 서초구청장, 영원히 젊은 대기자 손주환 공보처 장관, 광고학의 길을 열어준 이기흥 서울예대 이사장, 신군부 시절 출판사를 지켜준 성낙승 금강대 총장, 수목장(樹木葬)을 개척한 조남조 전 산림청장, 한국유학의 대가 윤사순 교수, 우리옛돌박물관 천신일 회장님이 그분들이다. 한 분 한 분 소개하며 나와의 인연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수목원의 푸르름처럼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했다.
2017년 지훈상 시상식이 나남수목원 책박물관에서 열렸다. 하객 소개에 영원히 젊은 대기자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이 인사하고 있다.
2017년 여름에는 구리-포천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서울에서 수목원 오는 길이 절반이나 가까워졌다. 3년째 공사하던 수목원 진입로도 2018년 6월에 완공되었다. 굽이굽이 새마을 길이 큰길에서 곧게 뚫린 5백 미터의 탄탄대로로 환골탈태했다. 30년 전 서울 서초구청에서 만난 젊은 사무관이 이제는 행안부 국장이 된 고려대 띠동갑 후배 정태옥(鄭泰沃)과의 우정이 이런 큰 선물로 꽃을 피웠다. 덕불고(德不孤) 필유인(必有隣)의 경지는 한참 부족하지만 살아볼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고 자위해 본다.
계단을 오르면 야생화밭 앞의 블루베리 50그루를 만나게 된다.
공간은 직접 발길이 닿는 만큼 확장된다. 수목원 조성 초기부터 생각만 하다 미루었던 수목원 초입의 풀에 덮인 작은 골짜기를 메운 공간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계단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지만 변경(邊境)의 소외된 땅이 양지바른 넓은 공간으로 나타나 가슴 뿌듯했다. 이 길로 야생화 밭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게 주변도 정리했다. 새로 생긴 공간에는 10년이 훨씬 넘는 블루베리와 아로니아를 50그루씩 심었다. 이제 수목원에는 아로니아가 9백 그루를 넘게 되었다. 달콤한 블루베리 열매는 산새와 내가 절반씩 나눠먹는 셈이다. 아로니아는 한여름 갈증을 치유하는 농부의 강장제가 되었다.
인수전 앞 고즈넉한 호수에 찾아온 봄날.
2018년 봄은 수목원에 새 식구가 부쩍 늘었다. 재원조달에 힘겨워하는 나에게 나무 욕심을 그만 부리라는 아내의 지청구에도 나무사랑을 핑계로 또 일을 벌였다. 지난가을에 이식작업을 미리 해 두었던 포천의 40년 된 우람한 주목 120그루와 일동의 20년생 반송 80그루를 반송 밭에 옮겨 심었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그 공간에 의젓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가슴 뿌듯했다. 손길이 많이 간 주목 120그루와, 가지를 밑에서부터 받아 수형이 예쁜 포천 송우리의 30년생 산수유 1백 그루도 이식했다. 이 반송 3천 3백 그루를 전지가위와 톱을 들고 일일이 한 번씩 만져주는 솔내음의 대장정은 1년이 훌쩍 넘게 걸린다. 나무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시간들이다. 이 녀석들이 스무 살이 넘자 이젠 그 큰 키로 나를 이기려는 듯 자신의 몸을 쉽게 내놓지 않으려고 앙탈을 부려 자꾸 일이 늦어지기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희들이 이 공간의 주인이고 나는 지나가는 과객인 것을. (20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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