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 일제에 맞서 싸운 조선의 마지막 선비 면암 최익현의 삶
면암 최익현, 조선 말기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으로 알려진 그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해 들어오는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우리 전통사상과 질서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문물의 적극 도입을 통한 발전을 주장하는 개화파와 대립하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한 그에게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발전을 가로막은 시대착오적 인물이라는 평가 또한 뒤따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결과론일 뿐이다. 평생을 왕조와 유교 사상 속에서 살고 공부한 선비들, 특히 최익현과 같은 위정척사파에게 왕조와 유교사상 그리고 국가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다.
저자 이승하는 최익현의 인간적인 면모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무엇이 그를 위정척사파와 의병장 활동으로 이끌었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최익현의 초지일관(初志一貫)한 자세에 주목한다. 지식인이라면 ‘권력과 영광’ 앞에서 초심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더구나 일제의 총칼 앞에서는 아무리 유학자라 해도 기존의 왕조와 사상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익현은 변심이나 변절은커녕 자신의 굳은 신념에 대해 의심하거나 회의하지 않고 한결같이 고지식하게 ‘우국충절’의 정신을 지켰다. 단발령에 반대하며 외친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는 말, 의병활동 끝에 붙잡혀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자 일본 땅에서 난 쌀로 지은 밥, 일본 땅에서 난 야채로 만든 반찬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투쟁 끝에 맞은 죽음이 바로 최익현의 한결같음을 잘 드러낸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 있는 부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장문으로 소개된 최익현의 상소문(上疏文) 내용이다. 최익현은 젊은 시절부터 장장 50여 년에 걸쳐 고종 임금과 상소문과 답서(答書)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를 통해 누구보다도 고지식하게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였으며, 그 때문에 고종과 주변 신하들의 노여움을 사 2번이나 귀향을 다녀오고서도 바른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통해 우리 왕조와 사상을 단지 유지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한 최익현의 우국충절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결국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최익현은 이제는 일어나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돌리고 모병 활동을 하던 중, 하루는 어떤 양반이 찾아와 최익현에게 이번 거사가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최익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 500년이 여기서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데 백성들 중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후손들 보기에 얼마나 부끄럽겠소? 내 나이가 일흔넷이지만 신하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소이다.”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잘 알지만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싸우겠다는 각오. 이것이 바로 대쪽 같은 선비 최익현이 택한 나라 구하기 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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