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나와 당신, 그 사이의 거리를 말하다
시인 김승희가 쓴 여성의 자아에 관한 검고 뜨거운 에세이
시인 김승희의 산문선이 출간되었다. 강렬한 언어, 그 시적 에로틱스의 현현을 보여주던 그의 아름다운 시세계 이면에는 혹은 연장에는 검고 뜨거운 산문들이 늘 함께했었다. 수 권에 이르는 산문집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자아, 여성의 자아와 관련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선집으로 꾸렸다. 1984년《벼랑의 노래》를 시작으로 근작《그래도라는 섬이 있다》(2007)에서 고루 뽑은 김승희의 산문 39편은 줄곧 그를 좋아한 독자뿐 아니라 처음 그를 접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그의 진면모를 보여줄 만한 일대기적 기록이다.
“삶이라는 것을 한때 자아를 찾는 과정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의 큰 골자를 이루는 ‘자아’, 자아에 대한 호기심과 한편의 애증은 그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커다란 토양이었다. 초기의 산문들이 여성으로서의 자아 그 자체에 골몰했다면, 후기의 작품들이 나와 연결된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래서일까, 자아를 탐색하던 시인이 40년의 여정을 돌아보며 내놓은 하나의 명제는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이라는 다소 섭섭한 한 줄의 제목이다. ‘나로 꽉 찬 나’라고 믿었던 내가 알고 보니 더 많은 지분을 당신에게 내주고 있었다는 사실. 그 깨달음을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글은 아름답다.
4분의 3의 당신들이 나에 대해 꿈을 걸고 사랑을 걸고 나에 대한 욕망을 반영해 줌으로써 4분의 1의 내가 만들 수 있었던 이상적 영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나(我)로 살고 싶다’, ‘나는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자아개념이란 나 자신의 홀로의 힘에서가 아니라 타자들의 꿈ㆍ사랑ㆍ욕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개념 속에는 4분의 3의 당신들의 사랑이 들어 있는 것이다. … 그렇게 사람이 나로 되는 데에는 나 혼자서가 아니고 상상계 속의 당신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100퍼센트의 나로 이루어진 무슨 초월적 자아가 결코 아니며 4분의 3의 당신들이 상상적으로 만들어 준 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들이다.
―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 中
자서에서 시인은 이러한 생각을 ‘거울과 유리창 사이의 거리’로 표현한다. 나만을 비추던 거울의 은분을 닦아내는 순간 밖으로 통하는 유리창이 되는데, 그 창을 통해 목격하는 세상이 결코 나와 유리되지 않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바탕으로 그의 산문을 초기 작품부터 읽어나가는 기쁨은 결코 작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위협적인 파고가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겁준다고 생각하는 독자들 모두에게 위로와 안식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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